‘탈핵’의 염원을 담은 천주교 희망버스, 나지막한 시동음을 내며 출발한 버스의 첫 운행은 조용했지만 가닿는 곳마다 세상이 요동치는 듯한 울림을 남겼다.
지난 1월 마을을 지나는 76만5000볼트의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던 고(故) 이치우(74)씨의 분신 장소인 경남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 다리 입구. 어머니 이민수(크레센시아·40·수원교구 용인 상현동본당)씨와 버스에서 내린 가이안(클라우디아·초1) 이선(니노·6) 자매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자신의 몸을 태우는 상상도 못할 아픔을 떠올리는 듯 아이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혔다. 수원에서 열린 아시아 실천신학 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밀양 송전탑 건설현장을 방문한 20여 명의 세계 각국 신학자와 활동가들도 희망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노인의 삶에 숙연해졌다.
천주교창조보전연대(상임대표 황상근 신부)가 지난 10월 11일 서울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탈핵을 주제로 연 ‘2012년 천주교 전국 환경활동가 워크숍’의 결실로 마련한 천주교 탈핵 희망버스가 10~11일 처음 찾은 밀양 송전탑 건설현장은 삶과 죽음, 정의와 불의가 극명하게 갈리는 곳이었다.
신고리핵발전소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세워지는 초대형 송전탑 161기 가운데 밀양 일대에 들어서는 것만 69개, 모두 100미터 높이가 넘고 140미터에 달하는 것도 적지 않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화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병 치유를 위해 이주해 온 사람이 유독 많은 이 평화로운 마을도 129번 송전탑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하루아침에 거덜이 나게 생겼다.
나무가 뿌리째 파헤쳐지고 헬리콥터가 흙먼지를 날리며 건설자재를 부리는 전쟁 같은 현장을 7년째 막아선 이들은 다름 아닌 칠·팔순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송전탑 건설부지 바로 아래, 컨테이너박스와 비닐 등으로 얼키설키 뒤얽혀 있는 움집이 이들의 신산한 삶을 대변해준다.
‘평밭마을 사령관’으로 불리는 한옥순(65)씨는 “하늘이 주신 것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역하는 인간들이 생명의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준한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는 “밀양의 어르신들은 금전적 보상이나 그 어떤 물질적 혜택이 아니라 생명을 끊어내는 행위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라며 “대도시에서 시작됐다면 벌써 끝났을 싸움이 지금껏 이어지는 건 땅과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어르신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의 말대로 한국전력공사가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사업을 시작한 지 7년째지만 아직 한 기의 송전탑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대신 산외면, 산동면, 단장면, 부북면 등의 공사 현장과 자재 적재현장 등 9곳에 송전탑 반대운동을 위한 천막과 농성장이 들어서 생명의 외침을 전하고 있다.
지난한 싸움 과정에서 고소·고발당한 횟수만 20번이 넘고 손배소 기록만 10억 원을 넘긴 노인들의 눈빛은 의외로 따뜻했다. 단장면 주민 고준길(70)씨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 자포자기해 있을 때 희망을 전해준 분들 덕분에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며 “우리의 옳음이, 정의가 불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태 달라”고 말했다.
하느님 사랑이 주시는 희망을 전하러 떠난 희망버스는 더 큰 희망을 싣고 돌아왔다.
천주교 탈핵 희망버스, 10일 밀양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 현장 순례
“주님 주신 생명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변해”
신고리핵발전소 전기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76만5000볼트 송전탑 161기 건설 추진 계획
발행일2012-11-18 [제2820호, 7면]
▲ 순례단이 지난 1월 고(故) 이치우씨가 분신한 현장에서 함께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