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의 막바지에 접어든 11월, 교회는 위령성월을 지내며 삶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아울러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경축하며 성대히 한 해를 마감합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환호하며 그분께 경배드려야 마땅한 오늘, 세상은 묵묵합니다.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송구함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어찌해야 할까…….
산란한 마음으로 펼친 성경에서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히브 10, 1)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림자’는 실제로 ‘있는’ 것만을 반영합니다. 그림자는 참모습이 존재할 때에만 생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라서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세상에 그분의 그림자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생각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1코린 13,12)을 믿도록 이끄는 도구가 되어야 하니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율법이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였듯이, 온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참 존재이신 말씀의 실재를 증거하는 그분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갈 때, 세상은 하느님을 보는 듯, 느낄 것이 분명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일은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죄와 죽음에 관한 논의를 꺼립니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사안을 모른 척 외면하며 적당 적당히 살아가도록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가급적 얼버무리는 일이 평화로움인 양 위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가치가 덜한 세상 얘기로 관심을 유도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면전에서 “나는 유다인이 아니잖소?”라며 한껏 무시하고 있는 빌라도에게 진리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하찮은 세상 권위로 허세를 떨며 “아무튼 당신은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라며 비웃는 빌라도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세상의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온통 껴안아 품으시려는 그분의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십니다. 거짓말도 모르고 겁나게 엄포를 놓을 줄도 모르는 주님의 순수한 얼굴이 보이는 듯, 마음이 움찔해집니다.
사실 우리는 빌라도와 퍽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유다인이 아닙니다. ‘잘난 척’ 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권력과 힘이 생기면 과시하고 뽐내기를 마다치 않습니다. 약자 앞에 으스대는 못난 짓도 거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 능력도 재력도 명예도 당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스스로 낮아져 수치 당하시고 고난 겪으시며 마침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모독하는 처사라 싶습니다. 모두 이방인들의 행태입니다.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 곁에 계신 그리스도 왕을 찬미 드리는 오늘, 그분의 것이 아닌 갖은 허물들을 털어내면 좋겠습니다. 고난마저도 당신께 영광을 바치는 빌미로 사용하는 지혜의 소유자로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고 수모를 당하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고난의 모습까지도 똑같이 살아내는 그분의 그림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림자는 있는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림자는 본래의 모습을 고치고 수정하고 달리 표현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그림자가 될 때, 하느님은 결코 상상으로 꾸며낸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의 모두에게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삶을 그대로 드러내어 퍼부어주는 사랑의 그림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삶이 공상이나 망상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뚜렷이 보여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알면서 지은 죄, 몰라서 지은 죄, 무의식적으로 행한 죄까지도 속속 드러날 그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긴박한 현안을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죄의 감옥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그분의 생명과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선물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그림자처럼, 그분의 사랑을 똑같이 살아냄으로써 얼른, 온 세상이 한 마음 되어 그리스도 왕께 환호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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