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떤 것인가, 또 후보 선택의 잣대는 어디에 밑바탕을 두어야 할 것인가’, ‘각 대통령 후보가 제시해 온 정치적 노선과 구체적 정책 공약들이 가톨릭 사회교리적 시각에서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인가’.
11월 27일 오후 3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층 대강당에서는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소장 강우일 주교)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공동 주최한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그리스도인의 자세’ 세미나가 열렸다.
대통령 선거가 3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전 국민의 관심과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날 세미나는 ‘선거와 신앙’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한국의 정당 정치와 민주주의의 현실, 제18대 대선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는 가운데, 가톨릭 신자들은 과연 어떠한 입장을 지니고 선거에 임해야 할 것인지를 논하는 자리였다. 또 가톨릭 사회교리 관점에서 각 대선 후보들의 공약들이 어떻게 비춰질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선거’ 문제와 관련, 그간 교회 내에서 후보들에 대한 정책 질의 혹은 신자들의 올바른 후보 선택을 촉구하는 성명서 발표 등의 움직임은 있어왔으나, 이처럼 주교회의 차원에서 ‘대선’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사례는 드물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세미나는 ‘사회복음화’ 입장에서 국민과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 선거와 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선택이라는 화두를 교회 내 전문가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낸 자리라는 긍정적 반응을 모았다.
김형준(다니엘) 명지대 교수의 제1발제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 이어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동호 신부(서울 신정동본당 주임)의 제2발제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른 각 후보별 정책 평가 -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대선후보 정책 질의 답변을 중심으로’ 가 발표된 세미나는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와 김녕 서강대 교수의 발제에 대한 논평으로 진행됐다.
이용훈 주교는 인사말을 통해 “사회교리에 따를 때 대통령과 같은 정치 권위를 포함한 참되고 완전한 권위는 하느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르고 인간을 위한 진정한 봉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번 세미나로 인해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냉철하고 이성적인 시각과 식별력을 바탕으로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한국 민주주의 현실’
“합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 정치 4.0 시대에서는 ‘타협’, ‘협조’, ‘합의’ 등 ‘3C’ 정치가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번 대선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필요하다. 과거와 같이 묻지마식 투표에 매몰되지 말고 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 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서 선택해야 한다.”
제1발제에 나선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18대 대통령 선거와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고찰하고, 이를 토대로 그리스도인이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한 표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유권자’(responsible voter)가 되기를 청했다. 또한 ▲역사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민주적 발전을 위한 철학과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시대정신에 입각한 비전과 정책을 갖고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등 ‘좋은 후보 선택 십계명’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우선적으로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을 언급하면서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치러지는 올해의 대선은 국가의 미래를 정하고 사회의 틀을 잡는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의 성격을 갖는다”고 밝혔다.
“18대 대통령 선거는 무엇보다 세 가지는 없고 세 가지만 있는 ‘3무 3유 선거’라는 특징 속에 국민들이 선거에 별로 관심이 없고, 후보가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쟁점(정책)이 없고, 후보들에 대한 치열한 검증도 없으며, 상대방 흠집내기에만 열중하는 네거티브와 표만 의식해 무엇이든 다해준다는 포퓰리즘만 있다”고 지적한 김 교수는 “대한민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동일한 헌법 하에서 5번의 대선을 치르고 2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룩할 만큼 절차적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룩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늠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공공화’(consolidation)는 아직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정당 정치의 위기와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언급한 김 교수는 “한국 정치의 최대 위기는 정치가 갈등을 조정하는 본연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유발 증폭시키는 것”이라 발표하면서 “대의 민주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국회와 정당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핵심”이라고 전했다.
▲기형적 대통령제로서의 권력구조 ▲퇴행적 원의 중심 정당 체제 ▲지역패권 정당체계 ▲정치 갈등을 고착화시키는 한국 국회의 퇴행적 구조 등을 정당의 퇴보적 변이를 유도하는 고유한 한국 정치의 서식 환경으로 제시한 김 교수는 “이로써 대화 타협의 실종, 감성적 포퓰리즘의 지배 등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당들은 오로지 권력을 잡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좋은 정당과 정치 지도자를 통해 대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게 최선”이라고 한 김 교수는 “분명 이번 대선은 단순히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결정짓는 중대선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논평에서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발제문에서 언급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으로 이번 대선이 중대 선거로 귀결되기를 기원한다”고 밝히고 “선거에 임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 공동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실상을 우리 신앙으로 판단하여 대표를 선택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면서 “사회교리는 대통령을 선출함에 있어 하나의 규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 가톨릭 사회 교리에 따른 각 후보별 정책 평가 :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정책 공약(예비자 공약)을 중심으로
제2발제를 맡은 박동호 신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홈페이지가 밝힌 각 후보의 정책 공약 및 언론 보도 내용에 따라 각 제안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을 살피고 정책을 평가했다.
박 신부는 우선적으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지난 10월 16일 대선 후보자들에 발송한 ‘제18대 대선 정책 공약을 위한 가톨릭교회 제안서’ 내용을 살피고 각 후보의 정책 평가 내용을 ▲인간 존엄 ▲언론의 자유 ▲평화 ▲환경/에너지 ▲경제 ▲노동자 보호 ▲사회복지 영역에서 정리했다.
박 신부는 ▲인간 존엄함과 인권의 관점(세계 인권선언에 기초) ▲정의(공동선)의 관점(사회교리원리에 기초 ▲평화의 관점 등 세 가지 평가 기준 하에서 “사형제도, 모자보건법 등 인간 존엄함과 인권 및 국가의 의무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 박근혜 후보 순으로 생명권에 대한 국가의 ‘존중할 의무’와 ‘보호할 의무’를 다하겠다는 뜻을 읽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국가보안법 등 시민적 자유권에서도 문재인 - 박근혜 후보 순으로 시민적 자유권에 대한 국가의 ‘보호할 의무’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했으며,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권리에 관해서 박근혜 후보는 원론적 국가의 보호 의무를, 문재인 후보는 법률적 구조를 통한 적극적 보호 의무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정의(공동선)의 관점에서(사회교리원리에 기초) 살펴볼 때는 두 후보 모두 FTA와 관련해서 경제적 접근을 하고 있었으며, 공공부문 민영화 면에서는 문재인 - 박근혜 순으로 ‘재화 사용의 보편 목적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전했다.
박 신부는 환경권에 대한 공약에 있어서 문재인 후보 - 박근혜 후보 순으로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남북 간 평화공존과 공동 번영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에 대해서는 평화의 관점에서 박근혜 후보의 신뢰 프로세스, 문재인 후보의 동북아 평화 비전과 국방개혁 기본계획 재수립이 돋보인다고 했다.
덧붙여 박 신부는 세 가지 평가 기준을 따를 때 ‘선거 관리위원회에 공표된 각 후보의 정책 공약이 경제 복지 통일 분야 등에 몰리는 점’ 및 ‘모자보건법 제14조, 신자유주의에 대한 후보의 철학, 노동권에 대한 공권력의 제한 등은 정책 공약으로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면’이 발견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박근혜 후보의 경제 민주화 공약이나 문재인 후보의 제주 해군기지 건설 중단 발언 등 선거관리위원회에 실린 정책 공약과 후보 및 관련 인사가 분야별 집단이나 지역에서 발언한 내용이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박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및 「가톨릭교회 교리서」, 「간추린 사회 교리」 등에서 제시된 ‘선거’와 관련된 교회 입장을 살피고 “투표 행위는 곧 국민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권리 행사이며 이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천부의 인간 존엄함의 실현이며 공동선 실현에 이바지하는 신앙 실천 행위”임을 밝혔다.
논평에 나선 김녕 서강대 교수는 박 신부의 사회교리에 따른 각 후보별 정책 평가를 회의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 등 두 가지 시각에서 평가했다. 김 교수는 ‘가톨릭 유권자로서 어떤 후보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잣대를 제시한다는 면’을 ‘긍정적’으로 꼽으면서, “박 신부의 발표가 유권자 교육의 일환으로 매우 바람직하며 후보들에게는 자신들 정책에 대해 사회교리적으로 성찰해 보고 정책의 정당성도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올곧게 가톨릭 사회교리가 가르치는 방향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누구인가 찾는 일과 함께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롤 모델을 제시하는 데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회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교리를 처음 접하거나 기회조차 없었을 정치인들에게 사회교리가 어떤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 것인지, 또 만약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우에는 과연 차별성이 있을지’, ‘가톨릭 신자라 하더라도그들을 사회교리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100% 공정할지’ 등의 질문을 던지며 “현실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신중한 평가가 요구될 것 같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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