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후 2시 30분이 가까워지면 서울역 근처 노숙인 무료 급식소 ‘따스한 채움터’가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노숙인들로 이뤄진 ‘꽃동네 채움 합창단’(단장 윤태용, 지도 우주호·최강지)의 연습시간이 돌아온 것.
길거리를 헤매던 노숙인들은 가진 옷 중에 가장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연습장소로 향한다. 평소 연습에 임하는 단원들은 20여 명. 갖춰진 연습실도 없고, 연습이 끝나면 다시 길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지만 연습시간만큼은 온갖 시름을 내려놓는다.
단원들이 서는 무대는 같은 처지의 노숙인들 앞이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합창단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 촛불 하나, 희망의 불씨를 찾아들다
‘따스한 채움터’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을 실시해온 서울 꽃동네 ‘사랑의 집’은 올해 4월, 이들에게 자활의 용기를 심어주고자 합창단을 창단했다. 손안에 가진 것이 하나 없어도 주님이 주신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내는 화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합창단을 돌보는 예수의 꽃동네 자매회 박미혜(마태오) 수녀는 “마음이 즐거울 때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생기는 법”이라며 “희망이 없는 노숙인들에게 노래를 통해 자신감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자신감을 동료들과도 나눴으면 하는 마음으로 합창단을 꾸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수녀와 원장 이해숙(소화데레사)씨를 비롯한 ‘사랑의 집’ 봉사자들은 창단 1달 전부터 ‘따스한 채움터’에 광고를 붙이는가 하면, 오디션을 마련해 단원들을 모집했다.
모집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은 겨우 두 명뿐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노숙인들에게 ‘노래’는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의 집’ 식구들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입단하는 이들에게 자장면을 사주기로 약속한 것. 자장면이라는 고소한 꼬임에 넘어간 이들은 결국 합창단원이 됐다. 이후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재야의 실력자들까지 30여 명의 단원들이 모였다.
정릉 다리 밑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다는 김철환(가명) 할아버지도 열혈 합창단원이다. 김 할아버지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따스한 채움터’를 찾았다가 합창단 모집 광고를 보고 참여하게 됐다”며 “처자식 건사하느라 노래방 한 번 편안하게 가보지 못했던 내가 합창단에서 친구들과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신바람 난다”고 밝혔다.
장애 6급 아내와 사업 실패로 힘겨워 하는 아들을 집에 두고 거리를 전전하는 이용호(가명) 할아버지에게도 ‘노래’는 삶의 시름을 잊게 하는 명약이다. 이 할아버지는 악보를 챙겨가 연습이 없는 날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열심이다.
■ 촛불 둘, 희망의 불씨가 옮아 붙다
합창단은 지난 10월 9일 서울역 지하도에서 소박하지만 특별한 무대를 펼쳤다. 꽃동네가 진행하는 ‘행동하는 사랑 학교’(Love in Action School) 참가자들과 함께 같은 아픔을 지닌 노숙인 앞에서 데뷔 무대를 마련한 것.
합창단을 만난 동료 노숙인 박경철(가명)씨는 “나와 같은 친구들이 보여준 관심과 실천하는 사랑이 큰 위로가 된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직접 무대에 서고, 실력이 쌓이면서 단원들의 삶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연습에 올 때면 옷매무새부터 정리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의사표현도 점차 적극적으로 바뀌어 갔다. 연습이 끝나면 다시 길거리 생활을 이어가야 하지만, 짧은 즐거움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음악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던 불협화음도 점차 안정돼 갔다.
합창단을 지켜봐온 박미혜 수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던 이들이 당당하게 자기가 원하는 바는 물론,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며 “이들에게도 희망의 빛이 찾아든 것”이라고 말했다.
단원들의 변화는 ‘사랑의 집’ 봉사자들에게도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합창단원이 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무료 급식 봉사에 동참해온 봉사자 임영규(요셉)씨는 “쪽방촌에 살면서 길거리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노숙인들의 아픔이 남일 같지 않았다”며 “합창단과 함께하며 우리 이웃들이 변화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내게도 즐거움”이라고 전했다.
합창단은 오는 27일, 한 해를 보내는 송년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합창단은 이번에도 서울역 지하도를 찾아가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단원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공감하는 같은 처지의 친구들 앞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따름이다.
합창단은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더 큰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충북 음성 꽃동네로 매년 1000여 명의 노숙인들을 초대하는 ‘음성 품바 축제’를 비롯해 연 2회 ‘행동하는 사랑 학교’ 참가자들과 함께하는 공연 등에 참가할 계획이다.
더불어 우주호 교수의 지도로 시골 농촌, 사회복지시설, 다문화 가정 등 문화 소외 대상을 찾아가 공연을 펼치고 일손을 도울 예정이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 희망을 나누고, 자립의 기반이 돼줄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석이조의 가능성에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적 기업으로의 활성화도 꿈꾸고 있다.
우 교수는 “하루살이가 절실한 이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고, 서로의 어려움을 보듬어 주는 합창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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