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한국가톨릭교정사목전국협의회 전국 봉사자 연수가 열린 충남 연기군 정하상 교육회관. 봉사의 체험을 나누고 앞으로 교정사목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하는 조별 발표시간에 한 발표자가 단상으로 나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국 13개 교구에서 모인 교정시설 봉사자 220명은 용기 있는 ‘고백’에 조금씩 술렁거렸다. 하지만 곧 여기저기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발표 후 많은 사람이 그를 에워쌌다. 모두가 돌아온 탕자를 뜨겁게 환영했다.
■ 밀려오는 어둠
▲ 여태용씨.
그가 건축 사업에 뛰어든 것은 2000년 초. 대기업 부장을 지내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사업에 대한 꿈을 위해 입사 후 10년 만에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씨의 기대감과 달리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며 사업은 위기를 맞이했다.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투자자들과 다툼이 잦아졌고,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투자자들은 그를 고소했다. 재판부는 여씨에게 “전형적 사기라고 볼 수 없지만, 미필적 고의(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예상하고도 그 행위를 행하는 것)에 해당한다”며 사기 및 횡령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제가 잘못한 거죠. 귀찮은 마음에 건축계획이나 상환계획을 잘 알려주지 않았어요. 큰돈을 투자하고 걱정하던 투자자들에게 참 무책임하게 행동했습니다. 한마디로 참 교만했어요. 그때는 내 멋대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참 함부로 대했습니다.”
수감이 결정되자 평소 가깝다고 생각했던 지인 대부분은 그의 곁을 떠났다. 가족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아내와는 이혼의 위기까지 갔다. 잘나가던 그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됐고, 모든 것이 끝난 듯 절망스럽기만 했다.
■ 담장 안에서 켜진 촛불
여씨에게 구치소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는 “원망 속에서 멍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내가 과연 이 안에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나 그렇듯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씨의 수감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전화위복이 됐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 수용자들을 위해 힘쓰는 봉사자들과 만나며 신앙의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묵묵히 봉사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욕심’으로 가득했던 지난 삶을 성찰하고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오래전에 세례도 받고 결혼식도 성당에서 올렸어요.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껍데기뿐인 신앙이었죠. 문득 ‘참 나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어디서 잘못됐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깊은 뉘우침을 통해 구치소 안에서 고해성사를 받은 여씨의 수감생활은 그때부터 180도 달라졌다. 그는 수감생활 6개월이 지나 천주교 방으로 옮겨졌다. 서울구치소는 수용자들의 효과적인 교화를 위해 종교별로 방을 운영하고 있다. 엉성했던 그의 신앙은 그곳에서 차근차근 다져지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복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한편 1년 넘게 미사 해설을 맡아 봉사했다. 또 방장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수용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신앙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음에 행복했다”고 말했다.
“구치소 안에서는 사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저녁 9시 뉴스 시간이 제일 재밌는 시간이거든요. 하지만 천주교 방에서는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그 시간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가족들과 수용자들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했어요. 그때 시작한 묵주기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참 뿌듯한 일이죠.”
■ 담장 밖에서 켜진 촛불
그는 2007년 11월 30일 출소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그의 축일(안드레아)이었다. 출소 후 그는 곧장 근처 의왕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는 수감기간 동안 구치소 담장 밖으로 보이는 의왕성당 십자가를 보며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아왔다고 했다. 성당에서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구치소 안에서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는 텅 빈 성당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더불어 교정사목 봉사에 평생을 바칠 것을 하느님과 약속했다.
여씨의 결심은 머지않아 실천으로 이어졌다. 우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교리지식을 보충해야 한다는 생각에 2009년 인천교구 선교사학교를 수료했다. 또 올해는 서강대 신학대학원 신학과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체험으로 얻어진 신앙에 교리를 보태고 싶었어요. 효과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는 일단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2010년 겨울부터 인천교구 교정사목위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인천구치소를 찾아 봉사한다. 그는 주로 자신의 체험을 수용자들과 나누며 신앙을 전한다. 그는 봉사자로서 구치소를 다시 찾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수의를 입고 있는 수용자들을 보니 눈물부터 쏟아졌어요.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너무 안쓰러워 자꾸만 안아주고 싶었어요.”
여씨는 “전국적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신 분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민다”며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짧은 봉사기간에도 그의 수감경험은 봉사에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 함께 봉사하는 이들의 주된 평가다.
인천교구 교정사목 담당 이경일 신부는 “구치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형제님은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씨는 누구에게든 자신의 아픈 과거를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열어 보인다. 그는 “편견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좋게 봐주며 격려해주는 분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저는 자랑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 하는 인터뷰도 어떻게 보면 제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일이지요. 하지만 진정성을 갖고 하느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큽니다. 앞으로 제 꿈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재 소자들과 만나는 거예요. 수용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기적이 나타나는지 전하고 싶어요. 기사를 통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