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월 서울 대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나의 전공과목인 전례를 가르쳤다. 당시는 교수신부가 많지 않아 전공과목뿐만 아니라 교의신학 일부 과목과 교부학, 한국 교회사 등 여러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한 과목을 준비해서 가르치는 것도 벅찬데 여러 과목을 가르치자니 너무나 힘들었다.
1970년대 신학교에서 보낸 시절은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학생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았던 혼란의 역동기 였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최창무 신부 후임으로 1978년부터 가톨릭대학 신학부장직을 맡게 됐다. 그때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돌아보니 기쁘고 뜻있는 일도 많았다. 나는 장래 대신학교 교수 수급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당시 학장님께 인재 양성을 위한 유학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실행이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나름의 인재 양성 계획을 세워보겠다고 다시 여쭸고, 허락이 떨어졌다. 이후 내가 공부했던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등 대신학교에 한국 신학생들을 장학금을 주면서 받아달라고 청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까니시아눔에서는 몇 명이라도 좋으니 보내라는 연락이 왔고, 프랑스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도 김수환 추기경님의 도움으로 3명의 한국 신학생을 받아주겠다고 대사관을 통해 응답했다. 매년 이와 같은 형식으로 몇 명의 유학생을 보내게 됐다. 1979년 처음으로 인스브루크 신학대학이 있는 까니시아눔에 3명, 파리 가톨릭 대학에 3명, 스위스에 1명을 유학시켰다.
당시에는 모든 경비, 심지어 신학생 용돈까지 포함하는 완전 장학금을 구해야만 했다. 로마를 제외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 전체 장학금을 구해야 했기에 힘들기도 했지만 그 후부터 매년 몇 명씩 유학을 보내게 됐고, 새로 설립된 가톨릭 대학들도 이러한 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라도 인재들을 양성하지 않았더라면 각 교구나 대신학교에서 교수 수급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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