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다. 신용협동조합(신협)이란 간판 자제도 그렇지만 간판을 내건 건물부터가 소박하게 다가온다. 4300여 조합원에 250억 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한 공동체라는 점이 쉬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신협이 자리한 곳이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금호동 달동네였을 뿐 아니라 그만큼 오랜 세월 가난과 싸워온 곳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논골신용협동조합(이사장 유영우)에는 단순히 가난한 지역주민들을 위한 금융기관이라는 위상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가난 속에서 키워낸 희망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수없이 쓰러졌다 일어선 이들이 손수 뿌리고 키워낸 곳이라 그냥 겉보기와는 다른, 눈물의 역사, 희망의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지난 역사를 떠올리는 유영우(토마스·59·서울 금호1가동선교본당) 이사장의 눈이 잠시 떨렸다. 논골신협 희망의 역사는 1992년 이 지역에 재개발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시작됐다. 재개발이 이뤄지면 오래도록 한동네에서 정을 나누며 살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 이곳 주민들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부와 안락함 대신 희망이란 이름의 공동체를 택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구조적 모순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어딜 가더라도 희망을 지닐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희망을 협동공동체에서 찾았습니다.”
뜻을 모은 지역주민들은 철거반대투쟁을 하며 1994년 말부터 협동조합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에 나섰다. 이때부터 ‘낮에는 싸움, 밤에는 교육’이라는 삶의 공식이 생겨났다. 이듬해 4월 꾸려진 ‘주민협동공동체 실현을 위한 금호·행당·하왕지역 기획단’은 이 지역 주민들이 만들어온 눈물의 역사의 첫 페이지였다. 기획단을 중심으로 주민들은 ▲경제협동공동체 ▲생산자협동공동체 ▲소비자생활협동공동체 ▲사회복지협동공동체 등 4개의 협동공동체를 세운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희망의 밑그림이 그려지자 자연히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한 실천이 뒤따랐다. 온갖 폭력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한마음으로 뭉쳐 임대주택을 요구하고, 임대주택에 입주될 때까지 머무를 가이주 단지를 요구해 뜻을 이뤄냈다. 사람냄새 나는 공동체를 향한 주민들의 눈물겨운 실천은 이들을 더욱 끈끈한 한 가족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1995년부터 자신들의 공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실험이 시작됐다. 변변한 집도 없던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이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설립출자금 3억 원을 만들기 위해 꼬박 3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동네마다 출자위원을 정해서 매일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천원이라도 생기면 출자금으로 적립하도록 했다. 그렇게 330명의 조합원이 만든 3억 원으로 1997년 11월 설립인가를 받고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처음 건물을 임대해 1명의 직원을 두고 시작한 논골신협은 세 번이나 터전을 옮긴 끝에 어엿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들이 꿈꿨던 생산자협동공동체는 지역특성을 살려 주민 40여 명이 일하며 매월 4000만 원 가까운 매출액을 올리는 ‘논골 의류생산협동조합’으로, 소비자생활협동공동체는 성동두레생협 등으로 이어졌다.
성동두레생협(이사장 이현옥)도 이 지역 주민들의 믿음과 사랑이 거둔 소중한 결실이다. 2002년 선교본당 산하 ‘평화의 집’ 한 켠에 신자들에게 밀가루와 유정란 등을 파는 매대 하나로 발을 뗀 생협은 논골신협이 2006년 12월 금호동 현재의 자리로 터전을 마련해 옮겨올 때 자본금을 대출받아 매장을 열었다. 지난해 7월 법인등록 요건을 맞춰 300명의 조합원과 3000만 원의 출자금으로 새롭게 출발한 생협은 주민들과 함께 꾸는 꿈의 그릇을 키워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넘어서 함께 삶의 희망을 만들고 나눌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세대가 하지 못하면 우리 자식들이 하겠지요.”
30년 가까이 한 지역에서 함께하며 공동체의 꿈을 키워온 유영우(토마스)·이현옥(소화 데레사·57·서울 금호1가동선교본당) 이사장은 자신들의 꿈을 낙관했다.
“‘한 사람의 꿈은 꿈이지만, 함께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처럼 우리는 함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도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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