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수인들은 12시간 노예노동을 하고도 밤이면 2시간 동안 공산주의에 대해 학습을 해야 했다. 학습을 할 때마다 모기들이 달려들어 고통은 더했다고 한다.
반금 노개영 부근에는 둑이 있었는데, 이 둑은 1939년 일본인들이 수많은 중국인들을 강제 동원하여 제방공사를 한 것이었다. 이 공사는 매우 위험한 과정이어서, 불과 몇 년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인부들이 공사 중 죽어나갔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날씨가 추우면 언 땅을 대충 조금만 파고 인부들의 시신을 묻어, 유골들이 밖에 나뒹굴기 일쑤였다. 중국이 공산화 된 후 반금 노개영에서도 수인들이 사망하면 대충 묻었으므로 어디를 가도 유골이 뒹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밤에 물고기를 잡으러 해변에 나가면 유령이 해변에 서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유언비어들도 난무했다. 수인들은 밤이면 해변에서 번쩍이는 것이 일본군에게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횡사한 원귀(寃鬼)라고 결론을 짓곤, 자기네들과 같은 처지라며 동정하곤 했다.
반금 제10 노개영에서 수인들은 라디오를 수리하고, 시계를 수선하고, 신발을 수선하고, 술을 만들고, 과수원을 하고, 돼지나 닭을 키우고, 벽돌을 굽고 또 그물을 가지고 바다나 호수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일도 하였다. 대개 한 사람이 새끼 돼지 60마리씩을 맡아서 키우는데 하루 돼지들이 4톤씩을 먹으므로 사료를 나르고 사료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는 일도 만만찮게 힘든 일이었다. 1970년에는 현대 화학공장이 세워져 요소(尿素) 생산까지 담당해야 했다.
늘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던 노개영 수인들은 1976년 9월 9일 새벽 1시 10분 모택동 주석이 83세 나이로 서거했다는 방송이 나오자 누구보다 반겼다. 또 애도기간 노개영의 수인들에 대한 기율도 엄하지 못해 수인들이 조금 편했다고도 한다. 12시간 노예 노동을 시키고 밤에 2시간 사상 교육을 시키던 것을 1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노개영의 수인들은 이른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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