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7일 오후 서울 명동 라루체에서 후원의 밤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고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데 더욱 매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각계 축하인사, 제2회 이돈명인권상 시상식, 축하공연 등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전·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해 인권 관련 단체 및 기관 관계자, 현장활동가 등 교회 안팎에서 350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해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을 한마음으로 기원했다.
인권위 운영위원장 이호중(사도 요한) 상임이사는 인사말을 통해 “인권위는 차별과 침해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라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암울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노력해왔다”면서 “오늘의 이 자리는 인권을 위해 중단없이 활동해 온 활동가들의 헌신과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어진 축하 자리에서는 각계각층의 치하와 격려가 쏟아졌다.
문정현 신부(전주교구 원로사목자)는 축하인사를 통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인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 이라며 “고통에 처한 이들과의 더욱 튼튼한 연대를 통해 인권을 신장시키고 사랑을 심는 데 앞장 서 주길” 당부했다.
강금실(에스더·55) 전 법무부 장관은 “인권은 공동체 자체를 온존하게 유지시켜 나가는 최상의 가치”라며 “인권위가 핍박받는 피조물 속에서 굳건한 기둥이 되어주길” 기원했다.
이미경(마리아) 민주통합당 의원은 “인권위가 있어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게 된다”면서 “우리 시대의 횃불로 암울한 시대를 밝게 비춰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축하행사 중 이뤄진 이돈명인권상 시상식에서는 8년 동안 고압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인권과 생존권 지키기에 앞장 서 온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가 제2회 수상자로 상을 받았다.
수상을 위해 밀양에서 올라온 손희경(80) 할머니는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우리 땅, 우리 고향, 우리 터전을 지키고자 했을 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상을 받게 돼 감사할 뿐”이라며 “고향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니다”며 물질주의적 세태를 비판했다.
■ 이사장 김형태 변호사
“인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 김형태 변호사
우리 사회 인권운동의 최후의 보루로 일컬어지는 천주교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이사장으로 교회 안팎의 인권운동을 이끌고 있는 김형태(요한·56) 변호사는 인권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가톨릭 인권운동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김 이사장은 인권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니라 특별한 무엇인가로 인식되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웃도 하느님도 아닌 자신에게로만 눈길이 쏠려있는 것 같습니다.”
1988년 5월, 51명의 회원으로 출범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립 멤버로 일찌감치 인권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김 이사장에게 인권위의 전신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산하 인권소위원회와의 만남은 새로운 눈뜸이었다.
선배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서울 미아리시장 안에 소박한 사무실을 얻어 나선 길이 본격적인 인권위 역사의 시작이었다. 인권소위가 활성화되자 독립을 제안해 1993년 2월 독자적인 비영리단체인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새로운 길을 열어 오늘에 이르게 한 이도 그였다.
“지금은 보편화되고 일상이 된 인권이 당시로서는 개념조차 희박할 때였습니다. 인권위가 걷는 길 하나하나가 인권운동의 역사가 될 정도였습니다.”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단체인 인권위가 걸어온 길은 김 이사장의 말처럼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 속에서 육화되기 위해서는 교회와 인권의 변증법적 결합이 필요했다. 그런 길에 우뚝 선 등대와 같은 이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의 사랑과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인권위는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추기경은 교회가 어떻게 예언자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를 든든한 배경으로 인권위가 어떻게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를 펼쳐나가느냐에 따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깊이와 폭이 달라졌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사반세기 넘게 교회 인권운동의 역사를 써내려오고 있는 김 이사장은 스스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한정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교회 역사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진정한 양심이 아니듯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 아님을 들려줍니다. 믿음대로 실천하며 믿는 그대로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 걸어온 길(약사)
복음적으로 사회 쟁점 해석·적극 접근
가톨릭교회의 기치를 내걸고 교회 안팎의 인권운동을 이끌어오고 있는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역사는 평신도 사회운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하 천정련)의 복음적 세상을 향한 모색에서 비롯됐다.
지난 1988년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를 목표로 내세운 천정련 산하 인권소위원회로 활동을 시작한 인권위는 인권의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끊임없는 모색을 통해 인권의 지평을 넓혀오다 1993년 2월 독자적인 비영리단체로 독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단체인 만큼 인권위의 걸음걸음은 점점이 인권운동의 역사가 되었다. 사회 분위기상 금기시되던 일들도 복음의 관점으로 새롭게 들여다보고 해석해냄으로써 사회 복음화의 활로를 열어온 것도 인권위가 일궈온 하느님나라의 모습이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을 비롯해 조작간첩사건 진상규명운동, 인혁당사건 진상규명운동 등은 우리 사회에서 순교자적 결단과 자세 없이는 나서기 힘든 일이었음에도 그 길에서 가장 앞자리에 서 있었던 이가 인권위였다.
무료 법률상담소 개소(1995), 양심수 석방운동, 이주노동자를 위한 인권운동 등 인권위가 교회 안팎에서 목소리를 높인 일들은 모두 인권의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돼 나갔다.
나아가 동티모르 인권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1996년), 일본 우토로 지역 동포 후원회 결성(1997), 이라크 파병 반대 활동(2004), 사형제도 반대 아시아네트워크(ADPAN) 결성(2006) 등의 활동은 인권의 지평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 모범 사례로 꼽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주노동자 실태조사와 지원을 위한 공동 활동(2004),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활동(2006), 용산참사 진상규명 활동(2009),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 운동(2011),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 활동(2011),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 해결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도가니 대책위원회 활동(2011), 생명평화대행진(2012) 등 인권이 쟁점이 되는 사안에 빠지지 않고 함께하며 진리의 등불을 밝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울러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인권문제를 가톨릭 신앙 안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비롯해 인권강좌, 인권학교 개설 등을 통해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나가는데도 기여하고 있다.
인권위의 눈길이 가닿는 곳은 그대로 그 시대의 인권 현장이 되며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상이 더불어 발전해 나가는 복음화의 텃밭이 되고 있다.
▲ 천주교인권위가 참가했던 2012 세계평화대행진.
■ 우리에게 인권·천주교인권위는…
-“인권의 다른 이름은 사랑, 행복한 연대.”(변영주 영화감독)
-“인권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연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서기호 진보정의당 의원)
-“인권은 미래 세대와의 연대다.”(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위는 우리에게 핍박받고 소외된 이들의 작은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라고 깨우쳐 준 존재다.”(강동균 제주 강정마을 회장)
-“인권위는 하느님께서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리 가운데서 함께 싸우고 계심을 보여주었다.”(‘사형수들의 대모’ 조성애 수녀)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게 만든 존재가 인권위다.”(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한옥순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