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땡!’ 소신학교 시절 어느 날(1963년), 점심 식사가 끝날 무렵 교장 신부님께서 게시판을 보고 수원교구 소속 신학생들은 1시까지 강당으로 모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소신학교에서는 라디오도 들을 수 없음은 물론, 일반 신문이나 가톨릭신문과 같은 교계 매체조차 볼 수 없었던 때였기에 영문을 모른 채 강당에 들어서니 신학생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1960년도에 입학할 때에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입학했는데, 이제부터는 신설된 수원교구 신학생이 됐으니 더 잘 해야 한다는 교장 신부님 말씀이셨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별 의미가 없었다.
겨울 방학이 돼 교구청으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수원 북수동 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40분 거리의 고등동주교좌성당 앞 단독 주택 당시 교구청에 가서 교구장 윤공희 주교님과 무엇을 하는 분인지도 모를 근엄하신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신학생 본분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분은 교구 모든 살림을 맡으신 장금구 신부님이셨다.
세월이 흐른 지금, ‘밀알하나’ 원고를 부탁 받고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며 그동안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교구 격동의 50년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2백여 년 전 순교하신 분들께서 하느님께 전구하신 기도 덕분에 오늘의 교구가 이처럼 성장, 축복받았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1963년 10월 7일 설정 당시 사제 28명(현재 425분), 신자 수 4만2548명(현재 79만여 명), 본당 24곳(현재 200곳)이던 교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것을 무슨 말씀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
두 번째는 고령 신부님과 병환 중인 신부님이 많았던 옛 시절과 달리, 지금은 당시 막내 신부님이셨던 장덕호 신부님마저 금경축을 지냈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어떤 말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역대 교구장 주교님들과 선배 신부님들께 감사드린다.
세 번째로 소사(부천)와 안양 장내동, 수원 고등동, 북수동본당 이외 모두가 농촌 시골 본당이었던 옛 모습 위에 순교자 믿음으로 가난한 교구의 초석을 이루신 옛 신자분들! 참 고생도 많으셨을 텐데, 그 고생은 하느님께서 위로해 주시리라 믿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