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성심시녀회와 성모자애원의 창립자이기도 한 델랑드 신부의 생애와 영성은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선종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학술 심포지엄과 강연회·미사 등을 계기로 그 삶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올해에는 ‘포항을 빛낸 인물’에 선정됨으로써 재조명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델랑드 신부의 삶과 영성을 돌아보는 기획을 진행하고자 한다.
▲ 1921년 루이 델랑드 신부가 부제일 때의 모습.
그의 부모는 깊은 신앙심으로 가난한 이웃들이 있으면 언제나 먼저 달려가서 도와주는 삶을 살았으며 델랑드 신부는 부모의 영향으로 유난히 빨리 사제 소명을 받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델랑드 신부는 성소를 3살 때부터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3살 때, 본당주임인 크레티앙 신부님께서는 우리 마을을 지나가실 때마다 나에게 ‘나는 자주 수단을 입는단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때 나는 신부님께 ‘당신처럼 될 거예요’라고 말씀드렸다”는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델랑드 신부의 부모님, 특히 그의 어머니는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처음 탄생한 사제성소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러한 마음이 지속될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써서 교육을 시켰다. 델랑드 신부는 본당에서 초등학교 공부를 하였고 1908년 본당 보좌신부와 1년 동안 라틴어 공부를 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성녀 듀체의 마리아학교와 아브랑쉬 노틀담학교에서 중학교 공부를 했는데 이는 현재의 소신학교였다.
1914년 10월 꾸땅스 대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15년 2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와 독일이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던 때에 군에 입대하여 운전병과 의무부대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 가운데에서 생과 사의 의미를 깊이 체험한 델랑드 신부는 1919년 9월 마침내 제대를 하였다. 그 해 10월 5일 꾸땅스 대신학교에 복학했으나 하느님의 새로운 부르심, 즉 선교성소에 대해 이끌리게 된다.
1921년 9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함과 동시에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였고, 1922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고 그 이듬해 1923년 4월 16일 프랑스를 떠났다. 홍콩, 대만, 상하이 등 여러 곳의 파리외방전교회 행정 사무소를 거친 후, 1923년 6월 5일 새벽 6시15분, 그는 부산 부두에 도착하였다. 50년 선교 생활의 터전이 그의 앞에 열리는 순간이었다.
(예수성심시녀회 자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