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개영 수인들에게 주어지는 노동은 매우 험했는데 그 가운데 탄광에서 광부 일을 하는 수인들도 많았다. 정정교구 소진승 신부는 1966년 문화대혁명 기간에 산서성 석탄을 캐는 광산으로 끌려가 광부 노릇을 하다가 1973년엔 다시 보산 탄광으로 이동돼 다시 5년 동안 광부노릇을 해야 했다. 29년간 이어진 강제노동에 소 신부는 당뇨병을 앓아 두 눈은 멀게 됐으며, 폐암까지 걸려 1981년 선종했다.
안휘성의 노개영 중에 노강현 백호국영농장 노개영은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장마철이면 여강이 범람해 농경지가 침수 되어, 노개 수인들이 인해전술 식으로 흙을 져서 날라 제방 공사을 지속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백호국영농장 노개영에는 수인이 2만여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공산당들은 사상범의 경우 형기를 마쳐도 석방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노개영에서 일하게 했다.
형기를 마치지 못한 수인들은 공민(公民) 권리를 완전 박탈당했다. 그들은 매우 힘든 노동을 12시간이나 하였으나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적은 음식만을 먹을 수 있어, 이곳 노개영에서도 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또한 백호국영농장 노개영에는 상해에서 체포된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비교적 많이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들은 신자들을 분산시켜 한 방에 한 명 이상은 두지 않았으며, 신자들에 대한 감시도 매우 심했다고 한다.
이 노개영으로 끌려온 신자 중 장마리아씨는 남들이 싫어하는 대소변통 옆에서 자고, 수인들이 짐을 운반해야할 때도 가장 무거운 것을 먼저 골라 지는 등 힘겨운 일을 솔선수범하며 신자로서 좋은 표양을 보였다. 대약진운동 때인 1960년 겨울엔 자연 재해까지 겹쳐 수인들에 대한 배식은 더욱 준 반면 노동 강도는 갈수록 올라갔다. 당시 장마리아씨는 가족들이 보내온 식품 등을 다른 수인들에게도 모두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엔 한 밤중에 광풍이 불고 장대비가 쏟아져 노개영의 대장(隊長)이 수인들을 깨워 논에서 물을 빼라고 지시했었다. 장마리아씨는 이 때 우비도 없이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성가를 부르며 논에서 물을 빼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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