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 23일 사제서품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923년 4월 16일에 파리를 출발한 루이 델랑드 신부. 그는 그해 6월 5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고 곧바로 한국어와 풍습을 배우며 한국의 관습을 따랐다. 또한 남대영(南大榮)이라는 한국이름까지 받아서 한국인으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후 6개월 동안 한국어를 익힌 후, 1923년 12월 17일 경북 칠곡군 가실본당에 처음으로 파견됐다. 그는 성가연습, 연극 등 전례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덕분에 매일 많은 신자와 어린이들이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를 했다. 특히 가정방문과 묘지축성으로 신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1924년 10월 부산진(釜山鎭, 현 범일)본당에 파견, ‘노동자의 집’(후에 ‘성가정의 집’이라 명명)을 설립했다. 당시 농촌에 있던 많은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부산에 왔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잠잘 곳도 구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델랑드 신부의 도움으로 집 세 채를 마련, 피곤에 지친 몸을 쉴 수 있었다.
부산진본당 이후 그는 대구교구 부당가 겸 남산동 성요셉본당(1928~1933)에 부임했다. 그는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영화를 제작했고, 당시 남녀를 분리하던 벽을 없애고 그 자리에 오르간을 설치해 가톨릭 사회에서는 남녀 분리나 차별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1934~1940년에는 용평본당(현재 신령본당 화산공소)에 파견되어 본당뿐 아니라 관할 지역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델랑드 신부는 또한 포교의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사회 의료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군생활을 하며 익힌 의료지식과 모국에서 보내온 의약품을 기반으로 무료진료소를 개설했다.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당시 서민들에게 무료진료소는 환영받았으며 먼 곳에 사는 비신자들에게도 알려졌다.
■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인 삼덕당 탄생(1935년)
델랑드 신부가 처음부터 수도회를 창설하겠다는 큰 원의를 안고 동정녀들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델랑드 신부는 용평본당 부임 후부터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헌신적으로 봉사할 이들을 찾았다. 그러던 중 1935년 12월 8일, 6명의 처녀들이 그를 찾아와 평생 동정을 지키며 그의 사목 활동에 협조하고, 일생 동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로 서약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집을 떠나 델랑드 신부가 마련한 작은 초가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 집을 ‘삼덕당’(三德堂)이라 칭하였다. 이는 신덕·망덕·애덕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이다. 델랑드 신부는 처음부터 그들을 ‘예수성심의 시녀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을 묵상시킬 때마다 “우리는 예수성심의 시녀들이다”라고 강조하며 그들에게 예수성심 시녀들로서의 정신과 소명을 가르쳤다. ‘예수성심의 시녀’란 호칭은 1952년에 ‘포항예수성심시녀회’란 정식 수도회명으로 확정되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