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입니다. 창세 이후 내내, 세상을 향한 짝사랑으로 가슴 앓던 하느님 사랑이 드디어 땅의 화답을 얻었던 기념일입니다. 수천 년을 품어 수없이 이어지던 사랑이 열매를 맺어 교회가 탄생하게 된 날입니다. 외면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질긴 사랑, 갖은 수모와 멸시속에서도 결코 곁을 떠나지 못하시는 사랑에 화답하기 위해서 마음 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그날 제자들처럼 뜨거운 주님 사랑으로 마음을 꽉 채워 살아가리라 다짐해봅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은 오순절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던 현장 상황을 고스란히 들려줍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에게 임하셨는지 그리고 교우들과 교회를 이끌어주셨는지를 실황중계 하는듯 합니다. 사도행전의 진짜 주인공은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으며,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당신의 에너지원이 쏟아져 내린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성령의 은사’에 힘입어 세상에게 은혜를 베푸는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1코린 12장 참조).
우리들이 성령을 사모하는 이유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를 끊임없이 소원하며 성령께서 ‘불의 혀’처럼 내려오기를 고대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 참조) 하는 마음이 곧 성령의 은사이며 선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민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현존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불만합니다. 용광로처럼 뜨겁다는 하느님의 사랑, 한없이 감미롭고 따뜻하다는 아버지의 자상한 손길, 살아계신 예수님의 생생한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주님의 인색함’인양 여깁니다. 헤아릴 수 없이 넓고 광범위한 그분의 힘을 고작 눈에 보이는 이적인양 오해하는 것입니다. 꼭 병이 나아야만, 꼭 잘 되어야만, 내 생각대로 술술 풀려야만 성령께서 도우신 것이라 곡해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터져 나와야만 성령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령은 나와 상관이 없는 줄, 요원한 것인 줄, 평생 누릴 수 없는 별개의 일로 여깁니다. 그런 탓에 신앙생활이 타성에 젖습니다. 믿음이 형식적인 치레가 되어 재미가 없습니다. 시시해집니다. 우리 안에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계속 무시합니다. 결국 신앙과 삶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우를 범합니다. 이미 오신 성령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횡포임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내 “성령을 모독하는 죄”(마르 3,29)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에서 태어난 이”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며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란 우리에게 보내주신 “다른 보호자”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보호자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진리의 영”임을 선포하셨습니다(요한 14,16-17 참조). 영혼의 주인이신 성령께 삶의 주인이 되어주시길 청할 때 ‘다른 보호자’께서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성령체험은 그분처럼 막무가내로 사랑만할 수 있는 사랑의 콩깍지를 뒤집어쓰도록 합니다. 내가 아닌 이웃을 위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 때문에 나를 위한 기적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처럼, 세상을 위해서 이적을 베푸는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에게는 고작 까마귀들이 날라주는 빵과 고기밖에 없을지라도 기꺼이 “다른 보호자”께 이웃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엘리야 예언자처럼 앞이 캄캄한 이웃의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는”(1열왕 17,16) 기적을 베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이렇듯 성령의 작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결을 부드럽게 변화시킵니다. 그분처럼 무조건, 무엇에든, 사랑의 바보가 되어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성모님처럼 이웃의 기쁨을 위해서 주님께 다가가 청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시는 그분의 정표입니다. 그 사랑을 거부하려 들거나 앵토라져서 성령을 무안하게 하거나 머쓱하게 만드는 무례가 우리 안에서 싹 사라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날’의 감격을 되새기는 오늘,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영적 생일을 자축하는 마음으로 그분과의 사랑에 녹아드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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