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명의 정녀들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초가집에서 ‘아무 것도 없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정녀들이 삼덕당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보금자리에 물밀 듯 몰려왔다. 정치·경제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정녀들은 그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형제·자매로 알아보고 한 가족으로 맞이했다.
■ 성모 자애원의 시작 – 노인·장애인·고아와 함께 생활
날씨가 몹시 추웠던 1936년 2월 17일, 의탁할 곳이 없는 할머니 한 분이 거리에서 밤을 새우다가 거의 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정녀들이 그분을 모셔온 것을 계기로 양로원이 시작되었다. 방 두 칸에, 하루하루를 이어갈 양식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살림이었지만 정녀들은 노인을 기쁘게 모셨다. 그 후에 여자 정신병자와 농아, 그리고 불구인 외국인 여아를 받아들임으로써 정녀들은 장애인을 위한 봉사도 시작했다. 고아가 된 여섯 살과 일곱 살의 자매가 이웃의 도움으로 정녀들에게 온 것을 계기로 보육원도 시작되었다.
정녀들은 염소 두 마리를 길러 그 젖으로 아기들을 키웠지만, 식량이 부족한 당시 상황에 정녀들 뿐 아니라 성모자애원 가족들 모두가 굶주림으로 하루하루를 이어 갔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은 사회로부터 각별한 환영을 받아 크게 확대되어 갔으며 루이 델랑드 신부는 이 활동을 ‘착하신 어머니의 사회활동’이란 뜻으로 ‘성모자애원’이라고 정식 칭호를 붙였다.
■ 영천으로의 이주(1940~1948)와 일본인들의 박해
1940년 델랑드 신부가 영천본당으로 파견되자, 정녀들과 용평에 있던 가족 33명(동정녀, 고아, 노인)은 함께 이동하여 영천본당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당시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터트린 후 다시 태평양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여서 외국인 성직자에 대한 박해와 감시가 고조되던 때였다. 1941년 일본은 프랑스 정부와 관련된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정녀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면서 삼덕당을 나가면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설득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이후 델랑드 신부마저 가두었다. 그러나 프랑스 영사의 개입으로 출감하였고 그후 일제가 항복하는 날까지 델랑드 신부는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 해방과 별십자구호회 조직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일제탄압에서 해방되었으나 뜻하지 않은 남과 북의 분단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광복을 맞아 만주와 일본에서 돌아온 100만 명이 넘는 동포들은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거기다 각종 전염병까지 겹쳤다.
이에 델랑드 신부는 정녀들과 함께 ‘별십자구호회’를 조직, 미군으로부터 수십톤의 구호물자를 얻어 차로 싣고 다니며 평등하게 나누어 주었고,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위급한 환자들을 찾아가 간호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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