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지칠 때, 저는 오늘 제1독서의 잠언 부분을 찾아 읽습니다. 그날, 아버지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로써 ‘그분의 즐거움’이 되고자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는 예수님의 천진한 고백에 마음의 시름이 걷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께서 손수 빚으시는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뭉클 전해져오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 강론 준비는 가장 소중한 직무인 반면, 벗을 수 없는 소명이며 멍에일 터입니다. 이 때문에 ‘멋진 글과 말을 통해서’ 단번에 신자들을 감동시키고 싶었던 새내기 사제 시절, 그 무게감은 만만찮았습니다. 어느 날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복음구절을 통해서 맛보았던 해방감을 어찌 설명할까요? 제 모자람을 인정하고 제 수준을 존중하며 제 꼴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주님의 넉넉한 품성을 느꼈던 그 순간의 소회를 어찌 표현할까요? 이후 저에게 강론 준비는 기쁨의 작업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광활한 당신 천국영역을 엿보는 즐거움으로 족했습니다. 강론은 사제가 체험한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일임을 깨달았던 셈입니다.
오늘도 난해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심오하고 골 아프게 ‘공부’ 시키려는 생각을 접습니다. 학구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개론이 아닌, 제 솔직한 느낌을 나누며 신비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감에서 해방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친근하고 진솔하게 다가오시는 주님과 조우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제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접하며 느꼈던 감격이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원해봅니다.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제 생각은 창세기의 첫 구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소식을 전하면서 ‘하느님의 영’을 가장 먼저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에서 인간에게만 하느님의 영이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진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어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죄인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기록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로마 5,12)는 역사의 현장을 전합니다. 저에게 이 사실은 진리를 드러내는 신비의 통로로 여겨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원죄가 후손들에게 자자손손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질 것을 천명한 이면에는 아담에게 불어넣어진 주님의 숨결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신앙의 훌륭한 선조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할 때에 “아담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집회 49,16)고 결론내린 것이라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담과 그리스도’(로마 5장 참조)를 비교하는 열정적인 글을 썼던 이유라 싶습니다. 마침내 아오스딩 성인이 죄에 넘어간 인간의 허약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된 은총에 감격하여 “오 복된 죄여!”라고 고백했던 것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날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불어넣으신 그 숨결이 지금 우리 안에 생생합니다. 더욱이 우리 안에는 그분의 몸이 모셔지니, 아담에 비할 수 없이 하나로 밀착되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듯,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삼위일체를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경지로 여기는 모습이야말로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꺾는 행위라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영으로 존재하며 주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유지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닌”(1요한 5,12) 것이라고 풀어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에게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결코 홀로 엄위하신 두려운 분이 아니고, 근접할 수 없는 먼 곳에 따로 계신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새길 복음은 삼위일체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느끼는’ 일이라 헤아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란 감히 죄 많은 인간이 주님과 한 마음 한 몸을 이루어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고자 삶을 단도리 하는 ‘은총’이라 새깁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된 우리가 주님과 한 마음이 될 때, 사랑의 삼위일체에 흡수될 것이란 약속이라 믿습니다. ‘나와 너’의 가림막을 부수고 ‘우리’가 되어 삼위일체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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