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반 동안 준비한 납골당과 유해 봉안소 건립 신청이 접수된 후 시청 게시판에 공람이 시작됐다. 1983년 약 45만㎡(15만평) 임야에 십분의 일이 석산이기에 제척지로 남겨두고 매장지 18000기를 허가 받았는데, 그 제척지에 약 4만3000기 납골당과 유해 봉안소 건립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고향 떠난 지 40년 만에 돌아와 웬 해골산이냐?” “겉으로는 납골당이지 속셈은 화장터가 아니냐?” “우물물을 먹는 우리에게 유골물을 마시게 할 작정이냐? 각성하라!” “낮이나 밤이나 곡소리를 들려주려고 고향에 돌아왔느냐?”
공원 묘원 입구 주위에 무려 28개 현수막을 설치했는데 어떤 것은 바람에 찢겨져 펄럭거리기도 했다. 주민들 입장에서 반대한다는 유인물을 묘원을 방문하는 유가족들에게 나누어 준데다 사방에 뿌린 3000여 장의 종이들이 산소 이곳저곳에 하얀 낙엽처럼 흩날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매장을 하기 위해 고인을 모시고 오는 시간에 맞춰 경운기와 트랙터로 묘원 입구를 막아 통행을 중단시키거나, 미사시간에 주민들이 50여 명씩 마스크를 하고 몰려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기(침묵시위)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특히 새벽 시간에 의도적으로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잠을 설치는 바람에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하는가 하면, 본당 미사시간 전에 사무실을 통해 전화를 걸어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 3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스크를 한 사람만 봐도 혈압이 올라가는지 머리가 띵하다. 심지어 TV 뉴스 대중 집회에 펄럭이는 깃발이나 현수막을 보면 가슴이 울렁거려 TV를 끌 수밖에 없다.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하면 들어주시리라’(1요한 5,14)하신 하느님과 가나의 혼인잔치를 염려해 주신 성모님의 도우심, 묘원에 고이 잠든 분들의 특별한 전구로 천신만고 끝에 ‘주민들과의 합의를 전제’로 한 허가가 나면서 최덕기 주교님과 신부님들, 5년 여 동안 한마음으로 기도해 준 연령회원들과 함께(약 4000명) 교구의 숙원 사업인 납골당과 유해 봉안소 기공식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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