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정리 정착
루이 델랑드 신부는 영천을 떠나 자신과 수녀들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항구도시로 타 지역 사람들과 내왕이 빈번하고, 외교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포항에 자리를 잡기로 결심했다.
델랑드 신부는 수녀들과 자애원 가족들이 자리잡을 곳을 구하려고 서둘렀지만 20명 수녀들을 포함해 110여 명의 자애원 가족들이 거처할 만한 장소가 쉽게 마련되지 않아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일본 해병들을 위한 막사로 지어졌다가 패전 직후 그들이 철수하면서 버려진, 붉은 벽돌집 두 채가 송정리 해변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한국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그 집의 점유권을 얻게 된 델랑드 신부는 이로써 용평과 영천에서 소규모로 운영해 오던 성모자애원을 포항으로 옮길 수 있었다. 고아들과 노인들, 장애인들을 위한 자선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50년 3월 델랑드 신부 일행은 포항으로 이사를 마쳤으나, 그 직후 6·25 전쟁의 시련을 맞게 된다. 8월이 되자 북한군이 포항시까지 침입을 시도했고, 국군으로부터 피신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지체가 부자유한 노인, 장애인들이 많은 데다, 어린이를 포함해 120명이 넘는 대가족이 피난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델랑드 신부는 성체조배와 기도를 이어가면서 모두의 안전을 간구했다. 이 과정에서 델랑드 신부는 폭격에 건물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인명 피해가 단 한 명도 없는, 기적에 가까운 체험을 하게 된다.
■ 사회복지 사도직
6·25전쟁 후의 한국 상황은 끔찍했다. 가난과 질병, 집 없는 사람들과 고아들, 의탁할 곳 없는 노인들이 전국에 만연하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전쟁 이전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 온 델랑드 신부와 수녀들의 자애활동은 사회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으며,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거나 병이 들어 갈 곳 없는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몰려들었다. 기존 자애원 가족들의 최저 생계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델랑드 신부와 수녀들은 찾아오는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처음 송정리에 자리를 잡았을 때 90명이었던 식구는 전쟁 직후 300여 명까지 늘어났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성녀 데레사 보육원이,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해 성 요아킴(백합) 양로원이 설립됐다.
또한 델랑드 신부는 미국의 원조기관인 가톨릭구제회로부터 지급받은 양곡, 밀가루, 분유 등의 구호물자로 지역민들을 위해 포항시 죽도동에 무료급식소와 구제원을 운영했다. 구제원에는 하루 50여 명 가량의 장애인과 피난민들이 찾아와 숙박을 했고, 무료급식소에는 하루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송정리에서는 500여 명의 이재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예수성심시녀회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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