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사도직
루이 델랑드 신부가 운영한 무료진료소는 하루에 80~90명의 환자들이 찾을 만큼 포항 동해안 지역에서 가장 요긴한 진료소로 자리잡았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많은 한센병 환자가 무료진료소를 찾았던 터라, 델랑드 신부는 메리놀회 스위니 신부와 의사 최시룡 박사와 함께 한센병 치료사업을 시작했다. 1957년 5월 송정리에 한센병 진료소를 설치한 델랑드 신부는 1958년에는 형산강변 송내동에 부지를 매입, 15채의 집을 지은 다음 60여 명 한센병 환자들을 정착시키고 그곳을 ‘베타니아 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 경제적 활동
델랑드 신부의 공동체는 한국정부로부터 한 달에 75달러의 부식비와 약간의 보리쌀 등을 배급받았지만, 수용자들의 생활비로 매달 1200달러가 필요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수녀들은 근처 미군들의 빨래를 해주고 품삯을 받거나 모래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고, 묵주걸이·납작인형 등을 제작해 외국 은인들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델랑드 신부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를 써서 프랑스와 미국에 보냈다. 자애원 아이들과 은인들의 결연을 맺어 주기 위해서였다.
성모자애원에 의탁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1960년대에 들어서자 35개 이상의 건물에 700여 명이 머물게 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델랑드 신부는 공동체 밖 주변 지역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주택을 짓고, 교량과 도로(7개)를 재건하고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 대처하게 해 주었으며, 겨울 저장고를 만들어 겨울을 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5천여 평의 산을 개간, 영세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서 농사를 짓게 하기도 했다.
■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부르심
196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1969년 11월 3일 프랑스 정부가 내리는 ‘레종 도뇌르(Legion d‘ Honneur) 최고 훈장’을 수상하는 등 델랑드 신부는 50년에 걸친 사제 생활 전부를 사회 복지 사업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영광을 뒤로한 채, 그의 나이 77세 때인 1972년, 서품 50주년 금경축 행사를 한 지 한달도 채 못 된 11월 17일 새벽 5시30분에 수녀들의 묵상 지도 자료를 준비하던 중 심장 마비로 선종했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암흑기에 한국땅을 밟아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아픔을 겪으며 해방을 맞이했다. 또한 6·25전쟁 이후 몰려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여 온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지난해 선종 40주년을 맞은 데 이어 올해 ‘2013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며 재조명받고 있는 델랑드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의 본질이 된다”는 말을 남겼다. 하느님 사랑 실천의 중요성을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예수성심시녀회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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