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사랑과 기쁨의 복음과는 왠지 거리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의외의 변수가 될 수 있는 문제성을 지닌 현장을 접하며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옳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의 모습과 상반되는 점이 당황스럽습니다. 이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주님의 놀라운 기적에 감탄한 사람이 기꺼이 주님을 좇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을 때, 미적지근한 주님의 반응이 의아합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머뭇대는 모습을 나무라며 아픈 곳을 쿡쿡 찌르며 채근하는 냉랭한 주님의 반응도 낯설기만 합니다. 당신 곁을 내내 지켰던 애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이없는 발상이 주님의 힘을 쫙 빠지게 했던 것일까요? 혹은 이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던 까닭에 주님 감정이 몹시 예민해졌던 것이라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세 해를 꼬박 함께 했던 제자의 발상이 고작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수준에 머문 것을 보신 주님의 속이 터졌을 것이 이해됩니다. 이 때문에 만사가 귀찮아졌던 것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따르는 제자들을 챙기고 격려하기에 적극적이던 주님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진 까닭을 찾고 싶습니다. 기껏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씀에 전혀 반기는 기색없이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신세 한탄을 하시는 일이 민망하다는 얘깁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동문서답을 하시더니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따라라”고 차별을 하신 점도 껄끄럽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오락가락하신 걸까요?
우선 마태오 복음에서 그날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는데요. 그날이 주님께서 큰 기적을 베풀었던 탓에 인기가 급상승했던 때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마태 8,18 참조). 이를테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말이 복음과 무관한 ‘급출세’의 전략이며 계산된 발언이라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를 쫓아오면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신세로 전락할 것을 따끔히 밝혀주신 셈입니다. 이런 짐작은 주님의 답을 들은 그 사람이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졌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싶은데요.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간곡히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기를 청한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라며 마치 불효를 조장하듯 말씀하신 속뜻도 오늘 복음의 다음 장에서 캘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 일흔두 명” 그날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던 숱한 사람들이 그 길이 결코 세상의 부귀와는 상관이 없다는 주님의 선언에 모두가 꽁무니를 뺐던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들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로 미루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이가 고작 일흔두 명뿐이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 구절을 들으면 늘 마음이 뭉클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주님의 읊조림 속에서 철저한 버림의 삶을 살아낸 당신의 외로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삶의 고통을 새삼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외양간에서 시작된 주님의 가난한 삶의 여정을 되새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철저히 전부를 내던지신 하느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인기인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는 단지 병이 낫고 빵을 거저 먹었던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중은 아무리 많아도 주님의 힘이 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주님 나라를 향한 십자가의 길을 알고서도 함께 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세상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 속에서 주님께서 쉴 수 있는 영혼이 얼마나 될지 묻게 됩니다. 지금 신앙인들 중에서도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내 것을 챙기려는 수단으로 삼는 “어떤 사람”이 존재합니다. 이런 헛꿈을 지닌 이들이 교회 안에서 어서 사라지기 바랍니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 주님을 포근히 감싸드릴 마음밭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예수성심성월을 감사와 흠숭으로 마무리하는 우리 마음마음이 주님의 쉼터가 되고 행복까지 선사하는 기쁨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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