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다녀오고 신학교에 복학하기 전, 동기 신학생과 함께 무전여행을 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돈 한 푼 없이 전국을 누볐고, 결국 무사히 40일의 여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받았던 모든 느낌, 그때 가졌던 모든 생각들, 그때 체험했던 모든 것들을 자그마한 공책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틈틈이 써두었던 일기는 몇 년 동안 저의 서랍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불현듯 그 기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여행 중에 받은 은혜에 대해서 보답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무슨 용기가 있어서 이렇게 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제가 펼쳐놓은 글들이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은, 제가 느꼈던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가난할 때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충분히 개입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저의 삶은 여전히 부끄럽고 형편없지만, 그런 저를 통해서라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람, 그 작은 소망이 여러분에게 느껴지기만을 바랍니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있는 ‘쪽지 편지’들은 그런 저의 마음을 담은 글들입니다. 저의 무전여행이 끝나고 한참 뒤에, 다시 그 여행을 돌아보며 적어 내려간 저의 작은 마음입니다. ‘가난의 의미’에 대한 재발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의 의미, 그리고 그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사랑. 이 쪽지 편지들을 통해서 제가 느꼈던 하느님을, 그 체험의 의미를 독자 여러분들께서 함께 나누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출판되어 누군가의 손에 들리는 순간, 책은 더 이상 글쓴이의 것이 아니라 읽어가는 이의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에서 길을 찾다’ 역시 예외는 아니겠지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단순히 재미를 느낀다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불현듯 무전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느끼든,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건 이제 여러분의 몫일 테니까요. 사실 이 책은 이제 저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것이겠지요. 제가 책의 말미에 적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니까요.
책갈피
물질적인 부가 미덕이 되고, 가난은 죄악이 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같은 행위라 해도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가난을 체험한다는 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일입니다. ‘가난’은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현실인데, 왜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은 결코 죄악도, 물리쳐야할 그 무엇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가난한 분이셨기 때문이지요. 그 가난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 이전에, 강생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강생은 바로 ‘자기 비움’ 신비의 절정입니다.
자신을 비워내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가난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 본문 154~156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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