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임을 맡았던 때입니다. 함께 연구소에 계신 원로 교수님께서 국제학회에 참석하기 전날, “교회사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려는 이들을 위해 그와 관련된 모든 논문들의 제목과 목차를 정리해서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려놓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큰 어른의 정중한 부탁 아닌 부탁에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예’라고 응답만 했습니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교수님이 권유하신 작업을 하려고 하니 제가 해야 할 일들도 너무나 많았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기도가 됐습니다. ‘주님, 이 많은 일을 도와줄 봉사자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면서 오전 내내 급한 일들을 먼저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작업을 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아 한숨만 쉬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설상가상으로 공동체 장상께서 공동작업이 있다며, 저에게도 시간이 되면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쉬어가고 싶은 마음에 몇 시간 동안 형제들과 함께 부지런히 쓸고 닦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수도원 마당에 자매님 한 분이 의자에 앉아 땀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낯선 분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 저로서는 예전 같으면 “여기가 어딘지 알고 들어오셨나요? 여기 공원 아니거든요”라고 했을 터인데, 그날은 마음이 착해지더니 “어디서 오셨나요?”하고 부드럽게(필자의 주장임, 하지만 당시의 자매님 주장은 제가 너무 무뚝뚝했다고 함) 말을 건넨 후, “땀을 많이 흘리시는데 물 한 잔 드시겠어요?”하며 모처럼 친절함을 나눴습니다. 그러자 그분 역시 “물 한 잔 주세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모시고 사무실로 가서 물 한 잔을 대접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가득 쌓여있는 논문들을 보시더니 “여기 뭐 하는 곳이냐”고 물으시기에, ‘연구소’라는 말과 함께 그날 오전에 있었던 제 마음과 “요즘 같이 각자 바쁜 시기에 자원봉사자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하며 한숨만 쉬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대뜸 “제가 도와 드릴까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는 지인 다섯 분에게 연락을 하시더니, 그들 모두에게도 흔쾌히 자원봉사의 확답을 받아주었습니다.
이후 그분들은 지금까지 틈나는 대로 연구소에 오셔서 한국교회사 관련 논문 제목과 목차작업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제가 있건 없건, 연구소에 오셔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봉사를 하고는 소리없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셨고, 그분들의 수고로움이 묻은 자료들은 차곡차곡 인터넷에 올라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날을 혼자 생각해 봅니다. 장상의 공동작업 권유에 제 일 바쁘다는 핑계로 사무실에만 있었다면, 수도원 마당에서 땀 흘리고 계신 자매님을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휴…, 정말 끔찍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힘든 마음, 급한 마음에만 갇혀 산다면, 자신을 위해 안배된 참된 나눔의 손길 또한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삶의 시선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 세상과 어우러지는 나눔 또한 기쁘게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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