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소리없는 총성은 정전 협정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종전이 아닌 정전상태에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의 핵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남북관계는 냉각되고, 올해 초에는 일방적으로 북한이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해 한반도에 다시 한 번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러한 현실은 한반도가 여전히 전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반증이며, 통일에 앞서 평화 체제 구축이 우선시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한다.
최근 사회 곳곳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한 배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평화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수행하고 있는 한국교회 역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는 2012년 3월 포럼을 개최, ▲김정은 체제, 지금 북한은 ▲북한과 통일하는 가장 멋진 방법 ▲한반도 휴전 60년, 이제는 평화로 등 북한의 현 상황을 이해하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또한 주교회의 민화위 위원장 이기헌 주교는 지난 6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을 통해 “남과 북이 과거의 미움과 증오를 잊어버리고 화해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전 60주년인 올해, 한국교회는 왜 ‘평화’에 주목하는 것일까?
주교회의 민화위 총무 이은형 신부는 “전쟁의 위험이 없는 평화로움 속에서 민족의 평화를 찾아가야 할 시점”이라며 “이제는 교회의 궁극적인 소명인 평화를 구현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난 2월 민화위 포럼에서 ‘한반도 휴전 60년, 이제는 평화로’를 주제로 발제한 조광 교수(고려대 명예교수)는 “전쟁과 평화는 인간 보편적 구원을 염두에 두는 교회가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다”라고 강조하며, 교회가 평화에 주목해야 하는 당위성을 일깨웠다.
▲ 북한이탈주민 ‘가정체험’이 끝난 후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북한이탈주민과 봉사자.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1963년)를 통해 평화로운 세계 질서는 진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건설되고 사랑과 연대로 완성되며 사람의 자유를 보장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제시함과 동시에 평화에 대한 권리와 책임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년)을 발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의에 맞서 싸우며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해 왔다. 1982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 북한선교부를 설치해 북한선교사업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하는 한편, 1984년에는 주교회의 상설기구로 승격시켰다. 1995년에는 서울대교구가 민족화해위원회를 발족시켜 본격적인 대북 인도적 지원을 전개했고, 1999년 10월 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에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변경함으로써 한국교회 전체 차원에서 민족적 화해와 일치를 지표로 활동하게 됐다. 이 모든 활동에는 ‘평화’가 바탕이 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활동이 대북지원과 북한이탈주민 지원에 국한돼, 평화와 통일을 위한 사목적 노력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기헌 주교는 “우리는 교회에 맡겨진 민족 화해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이 사명에 충실했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기도와 희생은 소수의 일이었을 뿐, 대부분 분단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무심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교회가 한반도 평화와 화합을 위해 얼마나 목소리를 냈는가에 대해 반성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오히려 정부의 정책에 따라 민족화해 운동의 흐름이 바뀌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상당한 제한을 받아 활동이 위축되기도 했다.
소희숙 수녀(서울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는 ‘2013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심포지엄’에서 “한국교회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질타하신 바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랑과 정의가 메마르고 물질이 신이 되어가는 사회의 축소판이 된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정부와 위정자들이 깨어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교회가 예언자로서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발자취 안에서 정전 60주년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회다. 평화에 대한 의무를 확인하고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펼쳐 보여야 한다. 평화체제가 구축되어야 통일도 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이제’ 교회가 나서야 할 때다.
■ 교황들 연설 속의 한반도 평화
“대화·협상 통한 한반도 평화 기원”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때문에 한국교회뿐 아니라 보편교회 역시 한반도 평화에 대해 언급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처음으로 맞는 예수 부활대축일인 지난 3월 31일 아침 미사를 거행한 뒤 첫 부활 담화(Urbi et Orbi)를 발표, 전 세계의 평화를 기원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며 “한반도에서 불화가 극복되고 새로운 화해의 정신이 자라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증오를 사랑으로, 복수를 용서로, 전쟁을 평화로 바꿔주시기를” 청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5년이라는 짧은 임기 중에도 한반도 평화에 큰 관심을 가졌다. 2007년 1월 8일 외교사절들과의 신년하례식 자리에서 지구촌이 당면한 과제를 지적하는 가운데 남북한의 화해와 한반도 비핵화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추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자리에서 “한반도에는 위험한 긴장 요소들이 잠재해 있다”고 우려하며, “한국 국민들의 화해와 한반도 비핵화는 협상을 통해 이뤄져야 하되 협상의 결과를 북한의 취약 계층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조건으로 내세우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같은 해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9월 30일 카스텔 간돌포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양측 화해의 노력은 남북한 국민들의 하나됨은 물론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이루는 데 큰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남북 대화의 발전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한국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드러낸 바 있는 베네딕토 16세는 또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2007년 11월 선교 기도 지향으로 정하고, 전 세계 가톨릭신자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을 당부했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문을 받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설문을 통해 “곤경에 빠진 북한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지지한다”면서 “화해를 향한 길은 길고도 험하지만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2003년 7월 교황청대사로 파견된 성염 대사의 신임장 제정 자리에서는 “남북한 사이에 시작된 결속은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운 화해를 도모하려는 신실한 의지가 보인다”며 “상호존중과 신뢰 깊은 명분들을 갖추면 훌륭한 결실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대화 노력이 두 나라의 화합만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 지역에 공고한 안정을 가져다준다”며 한반도 평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