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의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마치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걸 내세운 듯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덧다십니다. 주님의 폭탄선언에 제자들도 망연자실했으리라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속내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모 형제 처자식을 모른 척 하는 냉혈한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써 살아가는 마음가짐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해하지 않는 이유이겠지요.
이리 저리 생각을 이어 붙이며 강론을 궁리하던 제 마음에 2독서 말씀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주제가 한결 새롭게 새겨졌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최우선에 두는 참 사랑의 순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선명해졌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필레몬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 속에 담겨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강조되는 주님 제자의 모습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늘 우리 마음을 찔러 사랑의 관계를 더듬어 생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오늘은 특히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하게”(2베드 1,21) 하신 성령의 뜻이 살펴졌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가 너무나 귀한 까닭에 ‘굳이’ 성경에 삽입되도록 섭리하신 것이라 헤아려집니다.
교회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교우들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나아가 서로를 신뢰하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나로 인해서 상대가 위로 받기를 원하고 나를 통해서 누군가 평화를 얻기를 바라며 교우들이 나 때문에 행복해지기를 기도드리는 그 사랑이 교회를 튼튼하게 합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 하나도 돌보기가 벅찼을 늙은 수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살아가는 오네시모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마음앓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더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고의 고통으로 얻은 오네시모를 그저 대견해하는 사도의 시선이 편지 안에 고스란합니다. 그날 편지를 보낸 것은 오네시모와 맺은 탄탄한 사랑의 관계를 자신의 개인 도우미가 아닌 주님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게 하려던 열망의 결과였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백번 따져도 흠이 없고 지극히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자신의 타당함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렇듯이 선한 일일지라도 억지로 주장하여 승복시키려들지 않는 배려심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는 제자들의 마음가짐이라는 일깨움을 얻습니다. 필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회복이야말로 교회를 위한 유익이라는 점을 새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이기에 더욱 사랑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라 믿어집니다.
제자는 제자다워야 합니다. 삶 안에서 주님의 제자다운 맛을 유지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야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고 지낸다면 결국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는 존재일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제자라면서도 주님의 뜻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도 교회에서도 무가치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깁니다. 바오로 사도야말로 상대가 원할 때까지 동의할 때까지 변화됨을 기다릴 줄 알았던 주님 제자의 도리를 철저히 실천했다는 걸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의 협력자 필레몬”이 지녔던 사랑의 향기가 이역만리 감옥에 갇혀 있는 바오로 사도를 행복하게 했으며 위로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뜁니다. 누군가에게 가슴 뛰는 행복을 선물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흘러가는 순간순간이 주님 보시기에 무용지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문득 상대를 위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어린 편지글을 적고 싶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감동시키고 싶은,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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