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성지
“천주(天主)는 만백성의 대부모(大父母)시라.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는 배반치 못하겠나이다.”
형관의 명에 따라 죄인을 고문하던 형역(形役)이 고문을 포기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을 것임에도 그의 의지는 꺾일 줄을 몰랐다. 천주를 믿는다는 것이 죄명인 그는 온몸이 상해 더 이상 고문할 곳이 없기에 감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971년 수원유수부 토포청 충청도 내포 출신 원방지거 순교자의 심문 현장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수원 지역 곳곳에서는 강도 높은 박해가 계속됐다.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막대기로 쳐서 죽이는 ‘장살형’과 ‘참수’가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순교자들의 시신은 토포청 앞 미루나무에 걸려 끔찍함을 더했다. 비신자들도 자식들에게 “무당질을 하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마라”며 신신당부했다.
그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목숨을 내놓은 이들이 2000여 명에 달했다. 순교자의 피로 가득했던 수원유수부 토포청이 바로 지금의 수원성지(북수동성당)다.
▲ ‘달빛순례’ 참가자들이 수원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 남한산성성지
한덕운(토마스)은 남한산성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가 남한산성으로 가는 이유는 단 하나. 죽음을 당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쇠함이 없었다. 남한산성에 도착해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도 그 뜻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목에 서슬 퍼런 칼이 들어왔다. 1802년 1월 그의 나이 50세였다.
남한산의 관방기지였던 남한산성은 박해시대가 되자 변모했다. 남한산성을 관할하던 광주토포사는 산성을 신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특히 신앙의 뿌리가 내린 곳이자 수많은 교우촌이 밀집해있던 광주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가 300여 명에 이른다.
▲ 한덕운이 순교한 남한산성성지의 순교자현양비.
■ 남양성모성지
한국 최초의 성모성지로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 남양성모성지 역시 순교자들이 피 흘린 곳이다. 남양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양반 신분인 이들은 공주로 이첩돼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됐지만 신분이 낮은 이들은 남양 부사의 재량에 넘겨졌다. 남양 부사는 모진 매질로 배교를 강요하다 이에 응하지 않는 신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는데 그 자리가 바로 남양성모성지다.
신분이 낮은 신자들이 처형된 남양에서 순교한 이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을 통해 단 4명의 순교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남양 지역에 여러 교우촌이 밀집해 있었고 남양의 포졸들이 충청도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았다는 사실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남양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 최초의 성모성지인 남양성모성지.
■ 양근성지
1801년 신유박해, 서슬 퍼런 박해의 칼날이 시작됐을 때 윤점혜(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포도청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신앙을 굳게 지킨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자신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돼 처형당한다.
양근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윤점혜는 그렇지 않았다. 양근관아의 감옥에 수감된 그를 보고 함께 있던 여교우가 말했다.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해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7월 4일, 순교 당시 그의 목에서 흐른 피는 우유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전해진다. 참수되기 직전 윤점혜가 말했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했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꿔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종 윤유오(야고보)와 권상문(세바스티아노)도 이렇게 참수됐다. 조동섬(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토마스)도 양근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남한강 백사장으로 끌려가 목숨을 다했다.
현재 양근대교 옆에 위치한 순교터는 당시 남한강이 닿는 백사장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처형이 백사장에서 행해진 것은 순교자의 피를 강물에 흘려보내기 쉽고, 시신을 덮을 모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윤점혜·윤유오·권상문 등이 순교한 양근성지.
■ 죽산성지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사람들은 죽산을 ‘잊은 터’라고 불렀다. 오랑캐(몽고)들이 진을 친 곳이라고 해 이진(夷陣)터였던 그곳은 죽산관아 감옥에서 끌려가 처형된 신자들 때문에 ‘잊은 터’로 더 많이 불렸다. 사람들은 삼죽면의 삼거리를 ‘두둘기’라고도 불렀다. 포졸들은 신자들을 체포해 이곳의 한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시고 돈을 내라고 심하게 두들겼다. 박해의 잔혹한 실상이다.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24명이 죽산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다.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죽산에서 함께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데 프란치스코가 동생 필립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죽을 때까지 그가 놓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순교한 죽산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