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낯선 지명인 중국 방천. 길림성 훈춘시에 위치한 방천은 중국, 러시아, 북한이 만나는 삼국 국경 접경지역이다.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북한 땅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종남 신부) 북한 국경 순례단은 백두산 천지를 떠나 28일 방천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차 옆으로 따라 흐르는 두만강은 건너편 북한 땅의 모습도 함께 실어 날랐다. 희뿌연 유리창에 비친 가깝고도 먼 그 땅은 한민족임에도 서로 다투고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두만강변은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있다. 실제로는 땅과 땅 사이가 붙어있는 국경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철조망은 지구 반대편만큼의 마음의 거리를 만들었다. 순례단에게 허락된 것은 전망대를 통해 높은 곳으로 올라 아래로 보이는 북한 땅을 굽이굽이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우리나라는 형상은 반도국가지만 현실은 섬나라의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도국가라면 땅과 땅 사이를 육로로 이동할 수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 민족 분단의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누구나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분단 현실에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순례단을 이끌고 방천 전망대를 찾은 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허현 신부가 남북한 분단의 현실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전망대 꼭대기 층은 4면이 유리로 이뤄져 있기는 하지만, 창틀에 갇혀버린 좁은 시야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17살, 1·4 후퇴 때 강원도 평강군 남면의 내 고향을 떠나왔지요, 이렇게 두만강 가까이 와 볼 수 있을지 생각도 못했는데…. 당시에는 한 달만 있다가 다시 들어갈 것이라 여기고 나왔지만 이젠 돌아갈 수가 없어요. 떠나오기 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나는 것 같습니다.”
순례단의 최고령 김용하(바오로·79·수원교구 조원솔대본당)씨의 얼굴에 회한이 몰려온다. 김씨는 고향을 떠올리며 한참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통일이 된다면 육로를 통해 고향집을 찾아가고 싶다.
방천 지역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일화도 전해진다.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국내로 돌아가고자 이곳 방천까지 말을 타고 달렸지만 끝내 돌아갈 수 없었다는 것. 서울을 떠나 먼 곳에서도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눈으로나마 북한 땅을 만나고 느낀 안타까움과 설렘을 미처 추스르기도 전에 순례단은 빡빡한 일정 탓으로 여유 없이 도문으로 이동했다.
도문 강변공원에는 두만강 뗏목 유람선 코스가 마련돼 있다. 방천에서 땅 길을 통해 북한 땅을 만났다면 도문에서는 물길을 통해 북한 땅을 만났다.
맞은 편의 북한 땅은 함경북도 남양시이다. 서울의 한강 너비와 비할 바 없이 좁고, 철조망도 없는데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북한 땅이 있다.
유람선이 두만강을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찰나의 순간, 강변에 숨어 경계를 서고 있는 북한 군인과 마주쳤다.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먹을거리나 담배 등을 바라고 관광객에게 종종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단다. 순례단 사이 먹먹한 감정이 또 다시 밀려온다.
“이렇게 코앞에서 만날 수 있는 거리인데, 인사 한 번 나눌 새 없이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다니….”
땅 길과 물길을 통해 만난 북한 땅과 북한 주민들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지척의 우리 이웃이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순례단 중 한 명이 마이크를 들고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가슴에 사무치는 노래가 순례단의 귓가를 울렸다. 순례단의 눈앞에 펼쳐진 두만강은 내 가족, 내 이웃을 그리워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북한 국경 순례 동행기 (중)
지척의 북한 땅, 현실은 억만리 마음의 거리
땅길과 물길에서 만난 북한
발행일2013-09-15 [제2862호, 7면]
▲ 방천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북한 땅. 금세라도 강을 건너 닿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