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선정도서 3권을 구해놓고도 「흑산」은 선뜻 책장을 넘기게 되지는 않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의 표지에 검고 짙은 붓글씨로 인쇄된 ‘黑山’, 두 글자를 보며 어두운 산인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자마자 흑산은 바로 흑산도라는 섬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며, 신유박해로 흑산으로 유배를 가는 정약전을 통해 그 시대의 생활상은 물론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전파와 순교와 배교를 바라보게 하는 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 마침 9월은 순교자성월이다. ‘아하! 그래서 이 책이 추천 목록에 들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책을 덮고 나서야 순교자와 성인, 특별히 배교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기에 목숨을 바치는 것만큼 큰 희생은 없다. 그러기에 순교가 명확하면 기적 심사 없이 성인 반열에 오르고, 후세에 길이길이 추앙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모범을 따르려 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나는 오히려 그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폭력과 공포 앞에서, 내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배교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배교자가 있었기에 살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너무도 쉽게 순교자는 무조건 우러르고, 배교자에게는 배신자의 낙인을 찍어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는 그 당시 고통과 절망의 상황 속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이 바로 나였고, 정약전의 말처럼 그건 배교라기보다는 기교일 것이었다.
그 순간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지, 계시다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는지 그 캄캄한 절망 속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없음에,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차라리 하느님이 없다고 단정하게 될 것 같다. 지금 세상 법으로도 겁박에 의한 행위는 무효라고 하지 않는가. 무수한 매질과 배고픔에 고통 받고, 가족을 인질로 두고 회유하고 협박할 때 그로 인해 배교한 것을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좋은 책이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순교자성월에 배교자에 대한 내 관점을 돌아보고 기존의 인식을 수정할 수 있었고, 순교자뿐 아니라 배교자의 영혼을 위해서도 똑같은 감사의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이 책을 읽어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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