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의 자세를 가르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이야기로 세상의 호화로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깨우침 받았고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 이후의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깨우쳤습니다. 그런데 지난 복음의 말미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는 형제의 허물을 무한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의 어리석음을 애석해하고 거지 나자로가 누리는 내세의 행복을 마땅한 결과로 받아들이던 제자들 마음이 새록 찔렸던 모양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행할 것을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걸핏하면 믿음을 놓치고 애통하여 후회하는 우리 마음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 어려운 일, 무한히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결연하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대견한 청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선뜻 ‘믿음’ 한 덩어리를 선물해주지 않고 다소 엉뚱한 종의 자세를 일러주고 계십니다.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하바쿡 예언자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탄원했습니다. 갖은 재난과 억압과 폭력을 고발하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의 불의와 시비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을 “당신께서 구해”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간절한 기도에서 돌아온 응답이 뜬금없습니다. 칼데아인들을 보내서 더 큰 폭력이 자행될 것을 예고하시니, 예언자의 애타는 마음을 방관하시는 듯 보입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는 말씀에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무자비한 그들을 엄벌해 주지 않는지를 따졌을까 싶습니다.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는” 주님 속성을 들추는 일마저 속시원합니다(하바 1장 참조).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자란 듯 보이고 불만스러운 주님의 명령, “환시를 기록하여라”는 말씀에 순명하였던 점입니다. 이야말로 하바쿡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철저한 ‘갑’이심을 깨달았던 하느님의 성실한 종이었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오늘 우리가 그 말씀을 고스란히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니, 이쯤에서 하느님의 깊고 깊은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청을 들은 둥 만 둥, 주인과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을 능가하는 믿음을 갈구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라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의탁이 주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통로라는 사실을 놓칩니다. 이 때문에 먼저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주신다면, 주님의 지혜를 얻고 권세를 누리게 해 주신다면 확실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순서를 뒤바꿔 버립니다. 믿음이 곧 주님과의 합일이며 믿음으로 하느님과 내가 하나된 사실을 믿지 못하는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주님께서 믿음을 황금이나 다이아몬드 따위의 물질에 비하지 않고 생명력을 지닌 겨자 씨앗에 비유하신 점이 마음을 깨웁니다. 믿음이란 살아 생동하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문득 떠오른 야고보 서간에 영혼이 환해집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야고 2,20).
믿음은 내 스스로의 의지로 ‘갑’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을’로 살았던 삶을 살 것을 다짐하게 합니다. 믿음은 여태껏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했던 삶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믿음은 내가 원치 않는 것, 때론 내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것만을 선택하는 지혜입니다. 진정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일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합니다. 이야말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온 세상의 ‘을’이 되신 주님을 닮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단지 주인을 섬기는 종의 자세만을 언급해 주십니다. 주인이 내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조차도 종의 본분에 어긋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성장시키십니다.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살아있는 믿음의 힘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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