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갈수록 줄어가는 요즈음이다. ‘순교’ 또한 박해시대의 옛 이야기로 치부하곤 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신앙과 지금의 신앙은 그 가치가 다를까?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은 여전히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다. 특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실천돼야 할 가르침으로 강조된다.
‘가톨릭독서문화운동 - 신심서적33권읽기’ 9월 도서로 선정됐던 소설 「흑산」(김훈 저/학고재)은 천주교인들이 실천한 ‘이웃 사랑’에 감동한 조선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들을 세밀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이 「흑산」의 배경이 된 흑산도에는 뭍에선 사라져간 교회문화유산들이 꽤 풍성하게 남아있다. 순교자성월의 마지막 주간, 주교회의 미디어부 동행 기획취재 현장으로 이 섬을 찾았다.
■ 멀고 험난한 바닷길을 거슬러
깊은 바다와 우거진 숲이 푸르다 못해 검은빛을 띤다는 이유로 흑산도라 불린다. 조선시대엔 유배지로, 이후로도 1950년대까지는 오지 중의 오지로 꼽혔던 섬 흑산도를 향하는 뱃길은 여전히 멀다. 서남해 최남단의 섬 흑산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목포항에서 다시 90여km의 바닷길을 거슬러 가야 한다. 일년 중 2/3 이상은 풍랑으로 발이 묶이는 날이 이어져 잔잔한 바닷길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지금은 쾌속선으로 2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여정을, 300여 년 전 귀양살이를 가던 손암 정약전(1758~1816)은 황토돛단배 바닥에 엎드려 3일간 곤혹을 치르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
흑산 예리항에 들어서면, 인근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당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순례객들을 환영하는 예수성심상과 마주할 수 있다.
■ 이웃을 사랑하는 진리에 감동
소설 「흑산」속에는 순교자와 배교자가 있다. 죽기 직전까지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는 이들, 작가는 ‘그러한 배교가 과연 배교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소설을 기획했다. 배교자 정약전과 그의 조카인 순교자 황사영의 삶과 죽음에서 방점을 찍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 인간의 삶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바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 명료한 진리를 통해서다.
작가는 “초기 교회 신자들도 난해한 교리에 감동했다기 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가르침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습에 감동했다”며 “ 이 소설은 사랑의 진리에 감동한 민초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말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검은 섬 흑산도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 흑산도와 천주교
흑산도와 천주교와의 인연은 18세기, 정약전의 유배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약전은 오랜 시간 배교자로서만 인식됐지만, 최근 그의 삶과 신앙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불붙고 있다. 지난 1902년 흑산본당의 모본당인 목포 산정동본당 주임 드예 신부는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정약전이 유배와 머물던 집의 주인인 박인수는 신자가 되었고, 정약전은 조선어 성가를 짓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약전에 대해 심층 연구 중인 흑산본당 사리공소 선교사이자 정약전 사촌서당 파견자로 활동 중인 임송(아론)씨는 “정약전이 흑산에서 서실을 처음 지었을 때 그 이름을 매심재라 했다”며 “이 한자어를 합성하면 회개를 의미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1950년대 들어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흑산은 그야말로 생활공동체와 신앙공동체가 하나를 이루는 모습을 보였다. 한창 때는 복음화율이 80%를 웃돌기도 했으며, 현재 복음화율도 25% 수준이다. 특히 선교사들은 복음 선포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교육 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영세한 어민들을 위해 지은 조선소와 발전소는 지금도 흑산에 힘과 빛을 불어넣는 주요 기반시설로 꼽힐 정도다.
흑산본당 주임 이준용 신부는 “선교사들이 지은 흑산의 첫 중학교인 ‘성모중학교’ 건물은 앞으로 ‘흑산도 생활사 유물전시관’으로 확장, 리모델링될 계획”이라며 “이 전시관에는 ‘천주교실’도 갖춰, 현재 본당이 운영 중인 ‘초장골 박물관’의 전시품과 유물 등을 일반인에게 선보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순교자의 신앙도 배교자의 신앙도 모두 한 뿌리로 품어낸 흑산도. 이 섬에 깃든 이웃 사랑의 따스함이 이어지는 한, 흑산도 주민 모두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때가 올 것을 믿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