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갈전리의 어느 과수원. 탐스러운 배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10월은 배 수확이 한창이다. 여느 배와 다른 점을 찾기 어렵지만 이 배에는 생명을 섬기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이세찬(루카·55·평택대리구 미양본당)씨는 오늘도 생명을 섬기는 마음으로 농부의 길을 걷는다.
교구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이씨는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수확 철 특성상 농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을 돕고 있었다. 수확을 마친 배는 창고로 운반돼 상품을 고르는 과정을 거친다. 바구니마다 가득한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살펴가며 상처는 없는지 크기는 적당한지를 판별해 판매할 배를 고른다.
신자비율이 90%를 웃도는 갈전리의 농부들 역시 이씨와 마찬가지로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고자 뜻을 모은 가톨릭농민회의 농부들이다. 배 수확을 도우러 이 자리에 모인 농부들도 생명을 섬기며 살아가는 신자들. 농부들의 눈빛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낸 ‘생명’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풍년에 맛좋은 배가 가득 열려 농부들의 마음이 환하지만 사실 친환경 농업을 한다는 것은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다. 다른 농부들은 가려 하지 않는 ‘좁은 문’이다. 최근에는 친환경 농업기술이 많이 발전해 곡식을 주로 하는 농사라면 친환경 농업도 해볼 만한 일이지만 과수원, 특용작물 등을 주로 하는 수도권 농부들에게 ‘친환경 농업’이란 생계를 포기해서라도 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단 농약을 치지 않으면 수확량이 50% 가까이 줄어든다. 그나마도 병충해가 없었을 때의 경우다. 조금이라도 방충관리를 느슨하게 하면 나무가 병에 걸리기에 십상이다. 나무가 병에 걸리면 그해의 수확이 없음은 물론이고 나무를 회복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만 5년 이상이다. 올해도 풍년이라고는 하지만 농약을 치지 않은 농사에 비하면 70%의 수확량밖에 얻지 못했다.
그래도 갈전리의 농부들은 친환경 농업을 선택했다. 다름 아닌 ‘신앙’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하고서라도 사람을 살리는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갈전리 가톨릭농민회 농부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소신이다. 19년 동안 친환경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송인호(사도요한·61)씨는 “친환경 농업을 하면서 생명을 우습게 생각하면 정말 큰 일이 난다”면서 “생명을 대하는 매 순간을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되 수확 때 주어지는 결과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배 수확을 마친 이씨가 목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70여 마리의 소에게 건초를 주고 식사에 여념이 없는 소들을 둘러본다. 단순히 상태가 괜찮은지, 이상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관리자의 냉랭한 표정이 아니다. 한 마리 한 마리 눈을 마주치며 쓰다듬기도 아끼지 않는다. 마치 자식을 돌보는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이다. 우유를 생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씨에겐 이 소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한 생명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씨가 가장 아끼는 소는 새 생명인 어린 송아지들이다. 소들도 이런 이씨의 마음을 아는지 소리를 내며 이씨와 눈을 마주쳤다.
이씨의 ‘생명 섬김’은 농업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연에서 배운 생명에 대한 마음은 인간 생명에 대한 섬김으로 이어졌다. 이씨의 자녀는 넷. 이씨 역시 처음부터 자녀를 넷을 두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경제적 형편만을 생각했다는 넷째는 무리였다. 친환경 농업을 하다 보니 경제적 사정이 넉넉지 않았고 당시에는 다자녀를 위한 정부의 혜택도 없었다. 오히려 인구조절을 위해 산아제한 정책이 이어가던 시절이다. 뻔히 보이는 가시밭길이었지만 이씨는 생명을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잘 지키고 간직해야 한다”는 이씨의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어려움에서부터 크고 작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이씨 가족은 자녀가 많음을 은총으로 여겼다. 이제 네 자녀 모두 장성해 한집에 모여 살지는 않지만 집안 대소사에 온 가족이 모이노라면 이씨에겐 그만큼 큰 기쁨도 없다.
하느님을 믿는 농부로서, 생명을 키우고 돌보고 거둬 또 다른 생명을 전하는 이씨에게 생명을 섬기는 삶을 물었다.
“농부인 제가 생명을 섬기는 것은 먹거리를 안전하게 생산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지금은 내 것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잖아요. 하느님께서 거둬 가실 때까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에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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