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데릭스스튜디오(Derix Glass Studio)를 방문해서 한창 작업 중인 프로젝트들을 돌아보고 있었을 때 유달리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다. 선명한 오렌지 컬러의 플레시드글라스(flashed-glass, 앤티크 글라스 표면에 다른 색의 얇은 유리 막을 앞뒤로 덧붙여 유리 표면과 안의 색을 다르게 연출한 특수 색유리)에 화학에칭과 아스팔트페인팅 기법을 이용한 추상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형 색유리 패널들이 라이트박스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의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인 가이 켐퍼의 작품이었다.
가이 켐퍼의 작품을 이미 접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 작업광경을 보며 작품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책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 내 공항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실행된 그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프로젝트들을 보면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꿈만 같은 일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실현 가능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남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국제유리조형워크숍에 참여 작가로서 가이 켐퍼를 추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켐퍼를 추천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의 독특한 이력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건축유리로 수많은 공공프로젝트를 실행했지만 그의 학부 전공은 미술이나 건축이 아닌 토양학이었다. 켄터키 대학 토양학과를 졸업한 그는 취미로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시작했고 이후 워크숍과 세미나를 통해 현대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동향을 익히며 자신만의 경력을 쌓아갔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출발한 그의 작업은 199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있었던 요하네스 슈라이터의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 워크숍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디자인의 전환점을 맞이하였고 독일 스테인드글라스 공방과 인연을 맺어 기술지원을 받으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해갈 수 있었다.
켐퍼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함께 강의를 진행하면서 그가 매우 영민한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 외에도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부족한 투철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고 건축가들과 함께 일하면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들을 예술가들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접 분야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미국 벌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의 긴장과 속도감을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새의 움직임을 크로키 한 것 같은 느낌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강렬한 오렌지색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창 전체를 가리지 않고 창밖 풍경을 부분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실제 공간과 작품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이 상호소통할 수 있는 제 3의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다. 켐퍼의 작품은 여행객들의 동선을 고려하며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방향과 흐름에 맞추어 구성되어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는 작품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혼자 건축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건축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면 건축 공간 요소요소에서 제게 원하는 바를 전하는 속삼임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미대출신이 아니라는 어찌 보면 불리할 수 있는 조건에서 출발했음에도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겸허한 자세로 배울 수 있었고 다른 분야에서 얻은 지식들이 융합된 자신만의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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