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그날 주님께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루카 사도가 전하는 이야기는 들을 적마다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던 시간, 고통당하는 주님 곁에서 지껄여대는 인간들의 대화가 어찌 그리도 지리멸렬한지… 읽을수록 속이 상합니다. 그럼에도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과연 어찌했을지 생각해보면 막막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고작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며 주님을 조롱하며 시시덕대는 무리에 합류했을 것도 같습니다. 들은 소문에 솔깃하여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라면”이라고 빈정댔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처지에서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자기 죄를 인정하며 주님의 선하심에 의탁한 우도의 지혜가 부럽습니다. 가없는 은혜로 낙원을 허락하신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사무쳐옵니다. “주님, 이 죄인을 가엾이 여기소서… …”
솔직히 그날 골고타 언덕에서 이루어진 상황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똑같이 죄를 짓고 똑같이 벌을 받는 와중에 이리도 극명한 차별이 이루어진 사실이 믿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그 결과가 오롯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진실은 분명합니다. 똑같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길로 갈라섰습니다. 삶의 끝자락, 믿음으로 회개하고 그분께 맡기는 영혼에게는 당신의 나라가 허락된다는 약속을 확신하게 합니다. 순간의 선택으로 한 영혼의 낙원과 멸망이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합니다.
그날 죄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는 주님을 보면서도 악인들의 자세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묵묵히 모든 조롱과 모멸을 참아내실 뿐입니다. 그렇게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히 보여 주고 계십니다. 주님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능력도 행하지 않고 언제나 남을 위해서만 그 능력을 사용하며 기적을 베푸시며 철저하게 희생하신 성심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무지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묵묵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콜로사이 교회를 위해서 바친 기도에 마음이 쏠립니다. 오직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기를 청한 점에서 그러하고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기를 간절히 청하고 있기에 그러했습니다(1,10 참조). 그러다 문득 솔로몬 왕의 기도에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거기에다 또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주겠다고 선뜻 응답하신 일이 생각났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밝힙니다(1열왕 3,10-11 참조).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고백을 귀하게 들으십니다. 그날 우도처럼 스스로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순수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주님의 측은지심을 얻어내는 최대의 비결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그날의 우도처럼 주님과 함께 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념하는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색깔로 온전히 물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탄을 꾸짖는 지혜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함부로 대하며 모독하기를 멈추지 않는 세상을 회개시키는 복음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오로 사도처럼, 십자가의 우도처럼 진솔하여 주님의 심금을 울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마침내 우리의 기도가 솔로몬처럼 “주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늘에 기록되기를 탐해봅니다.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당신의 뜻을 실천한다면 그리 될 것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 만세소리 드높여 환호하는 삶을 살아가면 꼭 그리 될 것입니다.
우리를 천국시민으로 뽑아주신 주님 은혜에 큰 찬미를 바칩니다. 이제는 더욱 더 천국시민의 품격과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우리의 왕, 예수님 만세!
지금까지 집필해 주신 장재봉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김동일(예수회)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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