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의 종은 종 전체의 유려한 곡선과 세공으로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소리로 신자들을 기도로 초대하기도하고 그 자체로 축복의 의미도 지닌 시각과 청각이 함께하는 예술 작품이다.
신자들은 하루 세 번 종소리를 들릴 때마다 일을 멈추고 경건한 자세로 삼종기도를 바쳤다.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성당의 종소리는 하루 세 번 시간을 알렸고 축복받은 종소리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자 하는 신자들을 위한 준성사가 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당이 드물어졌지만 종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수원대리구 북수동성당(주임 나경환 신부) 입구 오른편 종탑에 설치된 이 종은 원래 1932년 11월 13일 심응영 폴리 신부(파리외방전교회)가 세운 고딕식 성당에 있던 종이다. 프랑스에서 1932년에 제작된 종은 폴리 신부 고향의 사람들이 구입해 보내 준 종으로 1933년 4월 23일 서울교구장 원 라리보 주교 주례로 축복됐다.
청동으로 주조된 북수동성당의 종은 대부분의 프랑스 성당 종과 같이 종탑위에서 추를 사용해 울리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청동성분으로 푸른빛을 띠는 종 정면 중앙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양각돼 이 종소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함을 알리고 있다. 또 종의 넓은 끝자락에는 포도넝쿨이 세밀하게 묘사돼 종 전체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와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0년 전 프랑스 종 미술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이 종의 가치는 역사 속에서 의미를 더한다.
1941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물자의 부족으로 모든 쇠붙이를 징발했다. 특히 일제가 가장 눈독을 들인 쇠붙이는 덩치가 큰 ‘종’이었다.
북수동성당에 징발 지시가 떨어지자 폴리 신부는 일본인 읍장을 찾아가 “우리 성당 종은 일본군의 적국인 프랑스에서 선교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며 “이것마저 가져다가 대포알을 만들 정도로 일본 경제가 다급해졌다면 바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일본인 읍장은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종을 숨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성당과 부속건물을 징발 당했지만 종은 수녀원 옆 헛간의 겨 속에 숨어 전쟁물자가 되는 수모를 면했다. 폴리 신부의 지혜와 용기가 종이 80년의 세월을 지나 우리를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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