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면 예수회 수련원의 2년 차 수련자들은 긴장과 기대를 합니다. 수련 2년 중에 가장 기대되면서 어려운 실습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무전도보순례’입니다. 일주일간 돈 한푼 없이 걸어서 성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순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걸으셨고, 제자들을 그렇게 파견하셨던 모습 그대로 수련자들은 길을 나섭니다.
일주일 동안 수련자들은 자신이 가톨릭 수도회의 수련자임을 밝혀서는 안 되고, 돈을 구걸해서도 안 됩니다. 돈을 구걸해서 그것으로 밥을 사먹거나 잘 곳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밥을 얻어 먹어야 하고, 재워주실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느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실 쯤에 저희 수련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밥과 잠자리를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름 모르는 젊은이가 청할 때, 그 사람은 수련자가 아니라, 예수님일 수 있다(마태오 25,31-46)고 생각해 보셔요. 오늘이 자선주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004년 12월에 저도 일주일간 순례를 했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한끼도 굶지 않았습니다. 집을 쉽게 구할 수는 없었지만 한뎃잠 자지 않고, 따뜻한 분들께서 내어주신 그분들의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닐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이 바로 이 기적일 것입니다.
잠자리를 내어주시면서, 밥을 차려주시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들을 하십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돈 한푼 없이 여행을 하냐?” 그러면 저는 그분들께, “당신처럼 좋으신 분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며칠째 무전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당신께서 제게 밥을 주시고, 또 잠자리도 주시잖습니까!”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당신들께서 그렇게 자선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고, 당신들이 가진 작은 것을 아주 크게 나눠주시기 때문에 제가 아무 탈 없이 순례를 한다는 말씀을 드려도, 세상은 흉흉하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우리 세상이 삭막하고 인심이 없다면 어떻게 제가 일주일의 무전순례를 마쳤겠습니까? 세상은 너무나 따뜻했습니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12월이었지만, 여러분이 제게 주셨던 그 따뜻한 밥에 담긴 사랑은 봄날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제 마음에 담겼습니다. 일주일 동안 저는 너무도 많은 따뜻한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들을 통해 하늘 나라를 느꼈고, 그분들께 하늘 나라를 지금 당신께서 만들고 계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지극히 가난한 곳에 오셨던 여린 아기 예수님, 지극히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난, 여림,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까? 내 가난과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이웃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있습니까? 내 이웃의 고통을 나는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현실을 알지 못하고 참여하지 않고 산다면, 최후 심판의 날,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왼쪽에 서 있을 지, 오른 쪽에 서 있을 지는 오늘 우리 이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내 이웃을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할 때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긴 그 제물을 사람들과 나눌 때 우리는 너무너무 기쁩니다. 그 기쁨과 감동은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예수님께 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에 가난하고 헐벗고 추위에 떠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그 절호의 찬스를 잡으면 됩니다. 내 앞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왔을 때, 이건 바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하늘 나라를 느낄 수 있는 기회임을 잊지 마시고, 확실히 잡으셔요. 그리고 바로 행동하셔요.
눈을 크게 뜨고 기회를 찾아 다니셔요.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수님입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함께 나누셔요.
김동일 신부는 2003년 예수회 입회,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철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필리핀 마닐라 LST(Loyola School of Theology)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201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현재 예수회 수련원 부수련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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