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올 한 해를 헤쳐 온 교회는 갈수록 희망이 사그라지는 현실 속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로 굳건히 자신의 십자가를 드러내며 그 어느 때보다 큰 울림을 우리 사회에 전해주었다. 물밀듯 밀어닥친 세상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는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 실현, 생태계 보전 등의 활동에 힘을 기울이며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특히 한국교회는 올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을 맞아 ‘신앙의 해’를 지내며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 복음적인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쇄신의 동력을 마련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아울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교회상을 심으며 주님의 기쁜 소식이 열어가는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엿보게 했다.
주님의 길을 넓히기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실천해온 한국교회의 지난 여정을 돌아봄으로써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에 다가서기 위한 희망을 꿈꿔본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 세상을 향한 선포
세상 속 나그네로 지상을 순례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신 주님의 ‘유언’(Testament)을 살아가야 한다. 살아생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첫걸음은 ‘다가섬’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로 먼저 다가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나하나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2013년 한 해,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표상을 따라 세상 속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찾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앞장섰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해 국방부 국가보훈처 경찰 등 국가기관들이 지난 제18대 대통령선거 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전모가 밝혀지면서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우리 역사에 정의의 선구자로서 이름을 새기게 됐다. 지난 7월 25일 부산교구 사제 121명이 시국선언의 물꼬를 튼 이래 마산·광주·인천·전주·대구·안동·대전·원주·수원·서울·제주 등으로 이어지며 군종교구를 제외한 15개 교구에서 한국교회 전체 사제 4835명(주교회의 온라인 주소록 기준) 가운데 약 43%인 2120여 명이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려 한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정의와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했다. 사제단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한 1,23)는 잠자고 있던 우리 사회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특히 이번 시국선언에는 그간 대사회적 목소리를 자제해왔던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남녀 수도회, 평신도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시대의 징표를 향해 새롭게 깨어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8년 동안 끌어오면서도 존재조차 미미했던 밀양 초고압 송전탑 건설현장, 이곳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가닿았다. 교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밀양 주민들과 함께하며 소외된 이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심었다.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은 225일간 작은 교회, 조그만 하느님나라가 됐다. 올 4월 8일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해 11월 18일까지 225일간 이어진 대한문 매일미사는 물러설 곳 없는 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오랜 싸움으로 지친 이들에게는 느티나무 같은 쉼터가 되어 주었다.
이 외에도 교회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현장 등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외로운 삶에 기꺼이 함께하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소명을 다하는 모습을 심었다.
▲ 8년 동안 끌어오면서도 존재조차 미미했던 밀양 초고압 송전탑 건설현장, 이곳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닿았다. 교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밀양 주민들과 함께하며 소외된 이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심었다. 지난 5월 24일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을 찾은 주교회의 정평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교회 - 생명을 지키는 교회
2013년을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열쇳말은 ‘탈핵’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핵발전의 위험성을 새롭게 자각한 교회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핵발전의 문제를 알리고 대안에너지를 모색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나 핵발전소의 잦은 가동 중단으로 ‘에너지 위기’를 실감한 올해, 한국교회는 ‘핵(발전)’의 비효율성을 알리며 정부의 에너지 정책 전환을 촉구하기도 했다.
지역 교구의 탈핵 도보순례, 탈핵의 대안을 모색하는 세미나가 이어지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확산돼 핵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기여했다. 주교회의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핵발전에 대한 한국교회의 성찰을 담은 소책자 「핵기술과 교회의 가르침―핵발전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성찰」을 발간해 핵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을 보편적인 가치와 사회교리의 관점에서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4대강 복원으로 대변되는 교회의 생태계 보전 노력은 올해도 꾸준히 이어졌다. 지난해 8월 오랫동안 생명과 생태계 보전을 위한 싸움의 최전선이었던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 유기농지 문제의 극적인 타결을 이끌어낸 교회는 ‘두물머리 생태학습장 조성’ 합의 1주년을 맞아 경기도 양평에서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하며 ‘4대강 재자연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새로운 사회 의제로 이끌어냈다.
사형제만큼 숱한 오해와 논란을 낳는 제도도 드물다. 그만큼 사형제도 폐지를 향한 활동은 가시밭길이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양심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생명의 배를 다시 띄운 건 오롯이 교회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었다. 교회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신선한 생명의 울림을 전해주고 있는 ‘생명 이야기콘서트’를 지속적으로 열며 생명 담론의 확장을 도모하는가 하면, 세계사형폐지의 날(10월 10일) 행사, 세계 사형반대의 날을 기념해 11월 30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생명의 도시(Cities for Life)’ 행사 등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생명의 영토를 끊임없이 넓혀나가고 있다.
계명은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일치·사랑의 교회
남북관계가 갈등과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올해로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사그라져가는 민족화해의 밑불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한국교회는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해 지난 6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서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봉헌하고 민족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되새겼다. 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2월 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한국천주교회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마련해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배제와 배척의 문화 극복이 평화 구축의 출발점이라는데 공감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외에도 각 교구는 새터민과 마음의 벽을 허물어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어 세상이 던져주는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화해를 위한 밑거름을 다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선 한국교회의 노력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산하 사회적기업지원센터는 지난 4월 센터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전국 40여 개의 가톨릭 사회적기업이 참여하는 ‘가톨릭 사회적기업 네트워크’를 출범시켜 나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또 올해로 설립 25주년을 맞은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해외원조 20주년을 맞은 한국카리타스 인터내셔널과 함께 사상 초유의 태풍 피해를 입은 필리핀과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리아 피난민 긴급구호를 위해 모금운동을 펼쳐 가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올 한 해 한국교회가 거둔 열매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게 ‘사회교리’ 확산이다. 지난 2011년 처음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지내는 ‘사회교리 주간’이 제정된 이후 올해 들어서는 전국 각 교구 및 본당, 기관단체 차원으로 폭넓게 사회교리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다. 각 교구와 본당별로 교육자료를 배포하고, 미사, 토론회, 강연회 등을 마련하는가 하면 청년들을 위한 교리에서도 사회교리 교육을 강화하는 등 전례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제3회 사회교리주간(12월 8~14일)을 맞아 ‘사회교리주간 교육 동영상’을 제작, 전국 본당과 수도회 등에 배포하는 등 사회교리가 신자들 사이에 뿌리내릴 수 있는 다양한 모색을 했다.
서울대교구가 지난 1995년 가장 먼저 사회교리학교를 개설한 이래 수원교구(1997년), 청주교구(2001년), 인천교구(2006년), 대전·전주교구(2009년), 제주·의정부교구(2011년), 대구대교구와 부산교구(2012) 등이 사회교리학교를 열어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 등을 마련해오면서 사회교리의 지평은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진 모양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 비해 상시적으로 사회교리 확산을 도모할 수 있는 교육공간의 부족과 사회교리 강사 부족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묵은 과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교회의 사회참여를 둘러싸고 해묵은 정·교 분리 논쟁이 가열되기도 했다. 특히 올해 다양한 사회 현안과 맞닥뜨리면서 사회교리에 대한 교회 안팎의 인식과 시각을 새롭게 한 면이 적지 않다. 나아가 교회의 교리와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를 통해 검증된 ‘사랑 어린 이정표’임을 확인시키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임을 되새기게 했다.
“하느님의 계명은 그분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계명은 언제나 인간의 성장과 기쁨을 위한 선물입니다. … 실제로 ‘복음’ 그 자체, 즉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교황 회칙 ‘생명의 복음’(1995) 제52항).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는 예수님의 단호한 어조가 메아리쳤던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