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저는 5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몇 해 전까지 남편의 잦은 외박과 술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네 명의 아이들은 거의 저 혼자 키웠고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혼도 수없이 생각했지만 신앙 때문에 견뎠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남편이 과거와는 다르게 일을 하고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가끔은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풀어지다가도 순간적으로 옛날 생각이 나면서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함께 미사를 보다가 뛰쳐나온 적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데 어떻게 하죠?
대답입니다
과거의 감정들이 쌓여서 형성된 ‘감정적 기억’으로 인해 어려움을 갖고 계시군요! 우선 저는 자매님의 질문에 주목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죠?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데 어떻게 하죠?”
일반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삶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사는 사람, 추구하는 가치는 있는데 살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추구할 가치 자체가 없거나 가치를 실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매님은 ‘용서’라는 가치가 있지만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살지 못하는 두 번째 경우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좌절하고 또 하느님 앞에서 죄송한 마음도 느껴지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자매님은 남편을 용서하고자 하시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들로 인해서 방해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죄책감보다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적 기억’과 ‘감정적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성적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잘 사라지지만 ‘감정적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잘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도 그 기억에 의해서 편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매님 안에 있는 부정적인 기억에 의해서 과거는 물론 현재 남편의 모습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감정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 없는 말이기에 그 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편의 행동으로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부터 화를 통해 사랑받고 싶었고, 의지하고 싶었던 마음, 두려웠던 마음 등 진정한 속마음까지도 말입니다. 혼자서 감정적 기억을 대하는 가운데 자칫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인 기억을 대하는데 있어서는 심리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기도가 매우 유익합니다. 자매님의 경우처럼 기도하다가 억울했던 기억이나 남편이 잘못했던 기억이 떠오르면 회피하거나 심리 상담처럼 그 기억 속으로도 들어가기보다는,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반복해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와 같은 간단한 기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들 기억의 장소 안에 긍정적인 기억들도 조금씩 채워나가는 작업도 병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매님께서 추구하시는 ‘용서’라는 가치는 때로는 길고 복잡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훨씬 많이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 곳이 있는 사람만이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임을 믿으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용서의 여정을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 문의 : 이메일 info@catimes.kr 을 통해 김인호 신부님과 상담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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