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칙의 전반적 구조와 내용
‘인간의 구원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번째 회칙으로 1979년 3월 4일에 반포되었다(참고로 교황님은 재임기간(1978년 10월 22일~2005년 4월 2일) 동안 14개의 회칙, 15개의 사도적 권고, 11개의 교황령, 45개의 사도적 서한을 발표하셨다). 회칙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교황님의 생각을 제시한 것으로, 이후 교황님의 사목 정책과 방향을 엿보게 해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회칙은 네 부분 - I. 위대한 유산, II. 구속의 신비, III. 구속받은 인간과 현대 세계 안의 인간 상황, IV. 교회의 사명과 인간의 운명 - 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교황께서는 전임 교황님들이 이루신 업적의 연장선상에서(I),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구속의 신비’에 대한 숙고에서 출발하여(II) 현대 세계에 인간이 처한 상황을 분석한 후(III)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 -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 - 에 비추어 현 시대에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IV).
인간을 향한 교회의 사명
교황께서 전임 교황님들로부터 계승하고자 하는 ‘위대한 유산’이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전후로 자신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교회 스스로 갖게 된 ‘새로운 의식’이다. 세상을 향한 ‘보편적 개방’과 ‘대화’의 자세를 견지하며 교황님은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새로운 대림의 계절’에 교회에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인가? 다음의 소제목들이 말해주듯 회칙이 바라보는 교회의 사명은 무엇보다 인간에 집중된다. ‘교회의 사명과 인간의 자유’(12항),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셨다’(13항), ‘교회로서는 모든 길이 인간에게로 통한다’(14항),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소명을 염려한다’(18항). 교회가 인간을 봉사 직무의 중심에 두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인간의 모든 운명에 일치시키셨기 때문이다. “이 인간이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이다. […] 인간은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 구속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기 때문이다”(14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일치를 이룩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교회는 다만 하나의 목적에 봉사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13항).
교회 사명의 원천인 ‘구속의 신비’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제시하기 위해 교황님은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존재와 사명의 원천이시요, 교회의 모든 활동의 지향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 향할 유일한 방향은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7항).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구속’은 어떤 사건일까? 회칙은 이 구속을 ‘새로운 창조’, 곧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드신 세계, 죄가 들어오자 ‘제 구실을 못하게 된’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래 지녔던 지혜와 사랑이신 신적 원천과 맺는 유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사건으로 제시한다(8항). 구속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인간의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셔서 인간의 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주시며, 인간 본성을 고상한 품위로 들어 높이신 사건이다. 구속의 신비는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데, 아드님을 통해 인간과 화해하시고 성령을 통해 인간과 가까워지신 하느님 아버지의 신적 사랑(9항)과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신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과 가치’(10항)가 그 안에서 밝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인간과 하느님의 유대를 회복시킨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대 세계의 인간이 처한 위기의 상황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일치시키신 인간,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인 인간을 위해 투신해야 하는 교회는 동시대 사람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늘 새롭게 묻도록 요청받는다(13~14항). 회칙은 우선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으로부터 반역과 파멸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15항). 인류가 이루어놓은 개발과 진보와는 정 반대로 인간성 자체는 타락과 퇴보의 길을 걸으며 현대인의 의혹과 불안을 가중시켜 온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인류가 이룬 진보가 동시에 인류를 향한 ‘위협’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부유와 빈곤의 현격한 대조, 자원 고갈, 환경 파괴, 부의 축적과 악용 등은 현대 세계가 겪고 있는 ‘윤리적 무질서의 증후들’인 것이다(16항). 한편 ‘도덕적 파멸’의 세기로 드러난 20세기에 치하할 인류의 노력으로 국제연합의 창설과 인권 선언의 결의를 들 수 있는데, 그 안에 담긴 정신의 온전한 실현은 아직 먼 이상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에 참여하는 교회
인간성 자체가 위기에 처한 현대 사회에서 교회에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일까? 교황께서는 ‘구속의 신비’ 곧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그 답을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일치를 이루심으로써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받게 하시고 ‘새 생명’을 부여하시며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어 인간을 그 내부로부터 변혁하신 것처럼,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진리가 실현될 수 있도록 모든 사람과 일치하는 것이 교회의 봉사 임무의 본질이요 핵심인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에 참여함으로써 이 봉사를 수행한다.
‘예언자’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회는 ‘신적 진리에 대한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한다(19항). 교회는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충실히 머물며, 말씀과 진리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이해를 통해 모든 이가 구원의 진리에 가까워지도록 인도한다. 특히 신앙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모하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고 끊임없이 또 다양하게 선포하고 전수’하며 이 직무를 수행한다. 교리교육은 이 직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사목자 뿐 아니라 수도자와 평신도 또한 교리교육 활동에 헌신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구체적으로 참여한다.
교회의 사제직 참여에서 회칙은 특별히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강조한다(20항). 성체성사는 교회의 ‘성사 생활의 중심이자 정점’인데,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신비, 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새 생명의 증여가 그 안에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그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게 되는데, 이 합일은 인간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구속적 행위’에서 비롯된다. 한편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의 밀접한 관계는 그리스도교 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데, 회개와 용서를 통해 인간을 하느님께 온전히 돌아서도록 하는 고해성사의 도움으로,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인간 안에 더욱 충만히 재현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직에도 참여하는데, 그분의 왕다운 직분에 참여한다는 것은 종으로 섬기러 오신 그분처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21항). 이 직무는 특히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이 받은 봉사의 소명을 일깨우는 것이다. 곧 교황에서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의식하고 그에 응답함으로써, 특히 “각자 안에 성숙한 인간성을 생성해 내게 만드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다운 봉사에 참여한다.
교황님은 ‘주님 탄생 예고의 순간부터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사명에 포함되신’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회칙을 마무리한다(22항).
한민택 신부는 2003년 9월 사제로 서품,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기획, 연구 담당)을 맡았으며, 지난해 12월부터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