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최영이 바르바라는 1819년(純祖19)경에 당서 유명한 순교집안에서 태어났다. 1810년 신유교난(辛酉敎難)때 순교한 최창현(崔昌顯)요한이 그녀의 큰아버지였으며, 부친인 최창흡(崔昌洽)베드로와 모친인 손소벽(孫小碧)막달레나 그리고 남편 조신철(趙信喆)까롤로도 이미 순교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훌륭한 환경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부터 부모님들의 모범을 본받아 참된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성장하여 결혼할 연령이 되자 부모님들은 그녀를 출가시키려 하였다. 이때 바르바라는『이렇게 중요한 일에 있어저는 지체가 높고 낮은 것이나、재산이 있고 없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글을 많이 배운 열심인 교우와 혼인을 하였으면 합니다』라고 부모님들에게 말씀드렸다. 부모님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북경(北京)」을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이었던 조 까롤로에게 그녀를 출가시켰다.
이때 바르바라의 나이는 20세요、까롤로의 나이는 44세였다. 비록 나이와 처지에 격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열성적인 교우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드렸으며、남편과 함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깊이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듬해에 아들이 출생함으로써 보다 큰 축복을 받게 된 그들은 서로 권면하며 교회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나갔다.
1839년(憲宗5) 기해교난(己亥敎難)의 박해가 한창이던 5월(陰)에 바르바라는 부모님들과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가족들은 포장(捕將)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엄한 신문과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미 까롤로가 순교한 후라 관청에서는 그녀의 집안을 잘알고 있었을 터이지만、까롤로가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집안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포장은 보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바르바라는 모친과 함께 각각 태장(笞杖) 2백60대를 맞았으며、여러차례에 걸쳐 주뢰형(周牢刑)을 받았지만 굳건히 신앙심을 지켜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살이 해어져 떨어져 나가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으며、옥중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 주었다.
당시 바르바라의 모친은 어린 딸을 옥 안에까지 데리고 왔었는데、딸이 받는 고통으로 인하여 자신의 용기가 꺾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딸을 일가친척에게 맡기었다. 바르바라도 이러한 모친을 본받아 자신이 데리고 온 아들을 친척에게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육신의 아픔을 참아야되는 것보다 힘든 희생이었으나 이제 꿋꿋하게 신앙심을 지켜야한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일이 있은 후 포장은 다시 바르바라를 끌어내어 배교를 강요하면서 공범자들을 대고、특히 그녀의 집에서 압수된 종교에 쓰이는 물건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고백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녀는 이 말에『차라리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따라서 동료들도 없습니다.
또한 저의 집에서 나온 물건을 누가 사라고해서 샀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곤장 2백50대를 맞고 주뢰형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중 형조(刑曹)로 이송된 바르바라의 가족들은 그곳에서도 고문을 받았지만 여전히 신앙심을 굽히지아니하여 바로 그날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선고를 받고 부친인 베드로가 제일 먼저 순교의 영광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아내와 딸에게『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천주를 찬미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음으로 순교한 사람은 모친인 막달레나였다. 본래 바르바라는 모친과 같은 날 처형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당시의 국법에 근친자를 한날에 처형할 수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한편 바르바라는 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교우들에게 쓴 편지 일절을 남기고 있는바、그 내용은『부모와 남편과 베네딕따(聖女 玄敬連)가 모두 순교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 안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국을 생각하면 스스로 위안을 받고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게 됩니다. 나는 기쁨이 넘쳐 흐르고 마음이 흔희작약(欣喜雀躍)합니다』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순교하게 됨을 감사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부모님과 동료의 뒤를 따르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인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당고개(堂峴)에서 참수(斬首)되어 원하던 순교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니、때는 1840년 2월 1일(陰ㆍ1839년 12월 28일)로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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