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뇌리 속에서는, 주님께서는 참으로 오묘하신 방식으로 당신의 사람을 부르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런 나의 깨달음은 김수환 추기경과 한 시대를 살면서 더욱 깊어졌다.
쉰이 넘은 늦깎이로 주님의 자녀가 된 내가 김추기경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오롯이 그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내게 추기경은 우리 시대에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분의 사랑을 펼치는 길이 무엇인지 열어 보여준 존재였다.
그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우리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일인 동시에 교회의 인권운동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스스로를 민주화 현장으로 불러내 많은 이들과 따뜻한 ‘동지’이자 든든한 ‘형제’로 만나게 했다. 서슬 퍼런 독재시절에도 김추기경은 두려움 없이 주님만 보고 그분의 길을 내달린 이였다.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해 3·1 구국선언, 김지하 시인 필화사건 등을 거쳐 1980년대 5·3 인천사태, 임수경 방북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역사적 현장에서마다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정치나 법을 떠나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라며 용기를 주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이렇듯 그는 독재정권의 폭압과 인권유린에 ‘사랑’이라는 무기로 대항한 그리스도의 참다운 투사였을 뿐 아니라 투철한 신앙인이었기에 반대자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인권이 하느님의 정의 안에 자리 잡게 하는데 누구 못지않게 큰 공헌을 했다.
김추기경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그가 만나온 이들만 보더라도 그의 지향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장애인, 홑몸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가난한 이들은 물론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했던 철거민, 윤락여성들과 사형수들에게까지 먼저 다가갔다. 내 기억에 그런 김추기경의 방문을 받은 이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워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다만 그 두려움은 그의 큰 사랑에 대한 경외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사랑 넘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타 종교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 추기경의 삶은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자(聖者)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를 추모하는 자리는 어떤 개인을 ‘신화’화하는 장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행했던 아름다운 일을 기억하고 이를 이어받는 계기여야 한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개인의 것이 아니므로 특별히 따로 추모할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가 믿고 의지하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입이 되고 몸이 되었던 것이니 그의 말과 행동은 그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차례다. 그가 미처 다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마저 바치는 일이야말로 남은 우리의 몫이다. 그의 삶을 기리는 것은 남은 이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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