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바보다.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함께 울고, 그들의 손을 잡아 줬다. 누구보다도 작은 모습이었지만 큰 사랑을 나눈 그였다. 김 추기경 선종 5주기를 맞은 2014년, 추기경이 심은 ‘바보’의 씨앗은 이제 싹을 틔우고 작은 꽃망울을 터뜨렸다. 김 추기경의 뒤를 이어 바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이사장 조규만 주교)을 통해 퍼진 ‘희망의 꽃’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
부산 ‘이삭의 집’을 운영하는 주영숙(카타리나) 원장에게는 100명의 자녀가 있다. 모두 뜨거운 가슴으로 낳은 귀하디귀한 아이들이다. 성도 다르고 나이도 30개월 유아부터 20대 대학생까지 천차만별이다. 성격도 제각각이지만 주 원장은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끊임없는 애정을 쏟아 부으며. ‘원장’이 아닌 ‘엄마’로 다가갔다.
이삭의 집은 정부지원 없이 순수 후원금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하는 개인 아동 양육시설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운영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원장을 포함한 4명의 직원이 있지만 국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해 어려움이 많다. 직원들은 급여도 거의 받지 못하고 사랑과 나눔의 정신으로 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원장은 가정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이 어디에서도 괴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한 마디로 ‘바보 엄마’다. 덕분에 아이들은 태권도, 축구, 수영 등 체육교육, 미술, 음악 교육, 인성·정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남부럽지 않은 어엿한 성인을 성장할 수 있다.
주 원장은 또 받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아이들에게 ‘나눔’을 가르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역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연탄 봉사와 반찬 봉사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봉사와 나눔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한다.
이삭의 집에서 자립한 아이들이 ‘친정’이라며 찾아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때때로 찾아와 동생들의 용돈과 살림살이를 챙기는가 하면 이삭의 집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진짜 가정의 모습이다.
한국 수력원자력에 근무하고 있는 이기훈씨는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며 집과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며 “항상 안부를 알고 싶고, 월급을 타면 선물해 주고 싶은 어머니가 바로 원장님이다”고 고백했다.
‘바보’ 같은 주 원장의 사랑에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이 2012년 이삭의 집 지원자로 나섰다.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바보 주 원장과 이삭의 집에 바보애인들의 사랑을 전달했다.
주영숙 원장은 “내 자식이 홀대받는 건 참을 수가 없다”면서 “우리 아이들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라는 시선을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돌보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매년 바보의 나눔에 1억 원이 넘는 성금을 봉헌하는 경동제약(회장 류덕희, 대표이사 류기성)은 또 다른 바보다. 바보의 나눔뿐 아니라 사회복지공동모금 등 기관단체를 통해 소외된 이웃 특히 HIV/AIDS 환우와 취약 사회복지 시설을 위해 나눔을 이어가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12월에는 기존의 성금에서 5000만 원을 늘려 기부했다.
류기성(알로이시오) 대표 이사는 “경기가 힘들지만 고맙게도 직원들이 열심히 해줘서 지난해를 잘 보낼 수 있었다”며 “적은 금액이지만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환우와 이웃돕기 성금도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최태성(44)씨와 김호정(율리아)씨의 바보 사랑 이야기도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EBS에서 수능 강의를 하는 강사로 이름을 날린 최태성씨는 동료 교사 심주석, 윤연주, 이희나, 윤혜정씨와 함께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위한 17세의 교과서」(들녘출판사)를 출간하고, 인세를 바보의 나눔에 기부했다. 현재까지 1200만 원 이상의 인세를 기부한 최씨는 개신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존경하던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정신을 따르고자 했다.
최태성 씨는 “동료들과 오랜만에 함께 작업했는데 인세를 의미 있는 곳에 쓰자 해서 기부했다”며 “김수환 추기경의 유지를 이어가는 바보의 나눔에 기부하면 더 좋은 곳에 쓰이지 않을까 생각해서 선택하게 됐다”고 전했다.
마산에서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호정씨는 김 추기경 선종 후 ‘바보의 나눔’을 알고, 정기후원자면서도 지난해에는 9월 미지급 초과근무 수당을 추가로 기부했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지만 생각지 못한 돈을 받게 돼 기쁘기도 하고, 이런 돈은 저 자신 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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