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칙 ‘인간의 구원자’가 신앙의 재도약과 새로운 복음화를 꿈꾸는 한국교회에 전해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가. 성장하는 신앙을 위하여
최근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에 이룬 양적 성장에 버금가는 내적 성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80~90년대에 비해 한국가톨릭교회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으며, 신자들의 영적 열기가 어느새 식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영적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회칙은 이 질문에 답할 중요한 실마리를 몇 가지 제공한다.
첫째로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는 신앙이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원대한 정치적 이념도 고상한 철학적 사상도 아닌, 인간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시기 위해 인간의 삶 안에 들어오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께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신앙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하며 활력을 제공받는다.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 향할 유일한 방향은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7항).
이 말씀을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으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은 내게 어떠한 것이며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나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가?
둘째는 ‘사도직’을 자각하는 신앙이다. 세례성사와 함께 모든 신앙인은 ‘예언자’요 ‘사제’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에 참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18항). 이 사도직을 명확히 인식한 신앙인은 교회에서 수동적인 방관자로 머물지 않고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오늘 많은 평신도가 교회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고 전하도록 다그치는(2코린 5,14 참조)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는 곳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다. 그 사랑을 발견한 이는 자신 안에 실현된 구원을 깊이 체험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자각하게 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에 신뢰와 관심을 두는 신앙이다. 교황께서는 인간에 대한 강한 신뢰와 관심을 보이셨다. 그것은 신앙의 내적 원리, 곧 예수님께서 당신을 모든 인간과 일치시키신 ‘구속의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예수님과 맺는 사랑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자체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하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삶에 깊이 감화된 신앙인은 동시대인의 삶 안에 들어가 기쁨과 고뇌를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산다.
“교회는 다만 하나의 목적에 봉사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시면서 강생과 구속의 신비에 담겨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의 힘과 그 진리에서 비추어 나오는 사랑의 힘을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3항).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자신의 고유한 사도직을 자각하며, 이웃의 삶 안으로 들어가 투신하는 신앙은 새벽 공기처럼 맑고 살아 숨 쉬며 주위를 변화시키는 신앙이 된다.
나. ‘한국인의 삶’에 투신하는 교회를 위하여
이제 한국교회에 맡겨진 사명에 대해 숙고해보자. 교황님이 회칙에서 제시한 교회의 사명은 오늘의 한국교회에도 유효한 것일까?
한국사회는 20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모든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경제 대국으로, IT 강국으로 급부상하였고, ‘한류’의 세계적 확산 등으로 문화적으로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단기간에 이루어진 발전은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남북분열의 지속, 지역과 이념 간의 갈등, 경제적·사회적 양극화의 가속, 경제위기의 지속, 부정과 부패의 만연, 청소년 범죄와 함께 각종 사회 문제의 급증 등이 한국사회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특히 인권, 노동, 환경, 복지 등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 대열에 들 만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교황께서 회칙에서 지적하시듯 ‘인간성’ 그 자체에 있다. 우리 사회가 이룬 급속한 발전, 개발, 부강 이면에 한국인의 인간성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가? 지금보다 비교적 덜 발전되었던 과거의 사람보다 우리는 더 ‘인간적’으로 살며, 인간적으로 더욱 ‘성숙’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과도한 경쟁, 물질주의의 만연, 경제제일주의 등으로 사람보다는 돈과 일과 이해관계가 앞서고 있지 않은가? 불신의 벽이 서로를 가로막은 우리 사회는 참으로 인간답게 살기에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한국인성’ - 그것은 분명히 있다! - 은 어떠한가? 외래 문물의 무분별한 도입과 전통 문화의 단절 등으로 많은 한국인이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을 한국인이게끔 해 준 사상, 의식, 가치체계, 전통 등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이 이러한 위기의식조차 갖지 못한 채 산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신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가수들의 춤과 노래에 열광하고 그들을 ‘한류’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빛낸 이들로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고, 자녀에게 소중히 전수해야 하는 ‘진정한 한국인다움’을 정말 우리는 그들에게서 발견하는가?
▲ 교회는 세상에 윤리적 무질서의 증후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투신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진은 지난 2012년 3월 19일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원년 미사 및 평화대행진’에 참가한 사제와 환경운동 단체 회원들이 핵발전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연대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인간의 타고난 존엄과 권리의 수호, 부정과 부패의 척결, 민주주의적 가치의 수호, 노동 현실의 개선, 가난의 대물림 극복, 환경의 보존, 과도한 물질문명과 소비문화를 거스른 새로운 문화의 창출, 불신과 갈등을 넘어선 참된 평화와 화합의 길의 개척을 위해 투신하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우리 사회가 폭력, 살인, 자살, 성의 왜곡과 상품화 등으로 채색된 ‘죽음의 문화’를 거슬러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서로가 인간으로 존중되고 수용되는 ‘사랑의 문명’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교회는 자신의 삶을 내걸어야 한다.
다음으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을 몸소 실천하는 교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을 본받아 섬기는 교회,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며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존엄한 인격을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종이 되어 주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는 우리가 각자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교회 안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소명이 무엇인지 새롭게 되새기도록, 35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생생하며 강한 목소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한민택 신부는 2003년 9월 사제로 서품,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기획, 연구 담당)을 맡았으며, 지난해 12월부터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