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혁(베드로·88·의정부교구 덕소본당)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마재성지를 찾아 기도한다. 매일 아침·저녁기도와 삼종기도를 거르지 않고 성지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한다. 전례력은 마치 그의 일상과도 같다. 전례력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는 정씨를 만나 전례력을 따르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저는 엉터리 신자예요, 엉터리.”
1일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을 때도 그는 마재성지에서 막 미사를 봉헌한 참이었다. 신앙생활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은 ‘엉터리’라며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늘 기도와 함께하는 그의 삶이건만 스스로 ‘엉터리’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제 믿음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어렸을 적부터 첨례표를 받아 기도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마재성지가 위치한 마재마을에서 나고 자란 정씨는 정약용(요한)과 이번 시복이 결정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형제의 후손이지만 세례를 받게 된 것은 60세가 넘어서다. 정씨의 집안 남자들은 대역 죄인으로 처형된 선조가 있음을 숨기려 세례를 받지 않거나 신앙생활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씨가 세례를 받고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례력을 따라 기도하며 살아온 어머니, 아주머니, 고모 등의 신앙을 보고 배우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엄동설한에 얼음장을 깨고 세수를 하고 조과(아침기도)를 했어요. 아주 엄격해서 조과가 끝나기 전까진 말도 하지 못했어요. 조과가 끝나면 그제야 잘 잤느냐는 인사를 나눌 수 있었지요.”
특히 정씨에게 큰 영향을 준 이는 고모 정광섭(아나스타시아)씨였다. 해마다 40여km 떨어진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을 찾아가 새해의 첨례표를 받아와 매일 기도생활에 매진했고 정씨에게 교리지식이나 신앙을 가르쳤다. 정씨도 심부름으로 서울까지 첨례표를 받으러 가곤 했다. 늘 신공(기도)에 엄격했고 연도의 성인호칭기도조차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던 고모의 모습은 아흔을 바라보는 정씨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정씨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미 첨례표와 고모의 신앙생활을 통해 전례력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덕소본당의 공소시절 마지막 공소회장이기도 한 정씨는 공소의 본당설립을 추진해, 덕소본당 1대 총회장, 연령회장 등을 역임하며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다. 마재성지를 마련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멀리 서울까지 가서 첨례표를 받아 기도하고 세례를 받아서는 공소에서 전례력에 따라 공소예절이나 공소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며 전례력을 찾아 살아가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사순시기를 지키기 위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달력을 보거나 집 근처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리면 된다. 전례력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고 기도하는 지금의 신앙생활은 그에겐 ‘엉터리’다. 예전에 비하면 너무 쉽게 기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엉터리’는 어쩐지 감사하고 기분 좋은 엉터리다.
“외람된 말이지만 지금은 주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느낌이 들어 행복합니다. 예전에는 전례력에 따라 기도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달력만 봐도 알 수 있으니 간편하죠.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계신 주님을 모시는 것이 더 좋지요.”
또다시 사순시기를 살아가는 정씨는 올해도 기도에 정진한다. 비록 옛 어른들과 달리 ‘엉터리’ 신자지만 그래도 그는 기도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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