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성사표를 받았습니다.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희생, 극기, 봉사의 보속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하고, 용서와 평화를 청하고 얻게 됩니다.
판공성사표를 들고, 고해소로 향합니다. 이 시기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고해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옵니다. 고해소로 들어가던 뒷모습과 나올 때의 얼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고해소를 들어가는 뒷모습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발걸음은 터벅거리고, 문고리를 잡는 손은 주춤거리고, 미적거립니다. 들어가기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올 때의 모습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분은 눈가가 촉촉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며 나오기도 합니다. 또 용서와 평화를 담은 얼굴을 하고 나오기도 합니다. 그 작은 고해소 안에서, 그 길지 않은 시간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고해소 안에서, 고해성사 안에서 어떤 체험을 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한낮에 물동이를 이고, 터벅터벅 우물가로 나온 여인은 낯선 유대인 남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여인은 물동이도 버려두고 고을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신나게 떠들어댑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한낮에 우물가에 나왔던 여인이 사람들 한복판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났다고 외칩니다. 네, 그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생수를 주실 분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이 기쁨으로 몸과 마음이 넘쳐났습니다. 우리가 고해소에서 체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넘쳐나는 기쁨.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용서와 평화, 위로의 선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자신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 합니다.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지를, 지금도 녹록치 않은 자신의 삶을 예수님 앞에 그대로 드러냅니다. 물 한 잔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끄집어 내십니다. 그녀의 아픈 과거를 들어주시고, 마침내 그녀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어둠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가지 못하고 숨었던 그녀가 스스로 사람들에게 갑니다. 자신의 존재, 소중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물가에서 그녀를 도와주십니다. 고해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신부님들을 보내셨습니다. 죄를 듣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도와주십니다. 당신께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죄와 어두웠던 과거를 듣고 용서와 평화를 허락해 주셨던 것처럼, 고해소의 사제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물 한 잔을 청하기 위해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해소가 얼마나 좁은 공간입니까! 하지만 고해소는 좁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생이 나눠지는 고해소는 어떤 벌판보다도 더 넓고, 어떤 바다보다도 더 깊습니다. 삶을 받아들이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는 고해소를 하느님께서 주관하시기에 그곳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도 괜찮은 곳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들어가고, 또 하느님께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소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났던 그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아픔, 상처, 나약함, 불완전함, 두려움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와 평화, 용서를 주십니다.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터벅터벅 고해소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순시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판공성사를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물가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립니다. 신부님들께 우리의 상처난 마음과 찢긴 과거를 천천히 들어줄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입니다. 아직 우물가에 사람들이 없을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는 우물가로 이번 사순에는 조금 일찍 나가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김동일 신부는 2003년 예수회 입회,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철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필리핀 마닐라 LST(Loyola School of Theology)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201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현재 예수회 수련원 부수련장으로 활동 중이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