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사회의 가정은 더 이상 대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핵가족화’ 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렇듯 작아진 가정 안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정서적으로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레 늘게 되었다.
반면에 예전에 여러 세대가 한 가정 안에 공존함으로써 누릴 수 있었던 다양한 역할의 모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부성과 모성의 불균형은 결국 자녀들이 균형적인 가정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가정교육 안에서 부성과 모성은 둘 다 중요한 것이다. 어느 것 한 쪽만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가정 안에서 참된 부성과 모성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현대사회가 부모들에게 거는 기대이며 요청이라 할 수 있다.
1. 불가분적이고 초월적인 부성과 모성
사실 하느님께서는 부부들이 인간생명을 전수함으로써 창조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이처럼 부부는 이미 ‘하느님 안에서 영원을 향해 운명 지워진 인간생명’을 전달하는 데에 자유로이 책임 있게 협력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부부는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으로 그들의 소명에 응답한다. 이러한 ‘특유하고도 배타적인 부부애’는 참 부모가 되기 위하여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참조 ‘가정공동체’ 11항). 이렇게 부부는 가정 안에서 자신들의 부성과 모성을 드러낸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부성과 모성은, 자연 안에서 다른 생물들의 그것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이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가정교서’ 6항)
이는 인간의 부성과 모성도 역시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초월적인 면을 지니게 됨을 적시한다.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부성과 모성이란 육체적인 책임에만 머무르는 것이 나이라 정신적인 책임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부가 드러내는 부성과 모성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 모델과 역동적인 임무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부성과 모성은 서로 분리될 수도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결국 모성은 필연적으로 부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부성도 당연하게 모성을 내포하고 있다(참조 ‘가정교서’ 7항). 때문에 부부는 서로를 좀 더 ‘대상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에 부성과 모성은 서로에 대한 충만한 의식과 책임감 안에서 올바르게 실현될 것이다.
2. 자기 봉헌의 증거인 부부애
현대사회 안에서 특별히 인간생명과 관련하여, 부부들은 부성과 모성의 책임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는 많은 부부들이 성과 인간생명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출산력’(fertility)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다. 사실 “출산력은 부부애의 결실이고 징표이며, 또한 부부상호간의 완전한 자기봉헌의 산 증거”이다(‘가정공동체’ 28항). 때문에 ‘출산’(procreation)이 불가능한 경우에라도 출산력은 그 의미와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다(참조 ‘가정공동체’ 14항). 그러므로 부부의 출산력을 단지 육체적 의미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영적인 시각으로도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이유로 ‘부부사랑의 일치’는 항상 출산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나누는 사랑은 이미 ‘영적 출산력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현대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결과로 성을 단순히 출산을 위한 수단과 과정으로 전락시키고, 인간생명을 자신들이 지니는 계획의 일부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부부의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사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찢겨지고 떨어져 나온 출산’ 앞에서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은 이미 그 존엄성 자체를 상실하였다. 때문에 불임부부들이 행하는 인공수정이나 복제는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을 자신들이 계획한 생산물로 대체하는 참담한 모습이라고 하겠다.
참으로 부부는 자녀 없이도 자신들이 맺은 혼인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살게 되는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을 올바로 수행해야 한다. 사실 부부의 혼인은 생물학적인 불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의지적으로 유발한 행위의 불임’에 의해서 깨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혼인은 부부가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과 인간생명을 위한 봉사의 길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다(참조 ‘가정공동체’ 14항). 결국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은 부부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에서 이미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 그리스도인 부부는 책임 있는 부성·모성 실현을 위해 서로에게 자신을 바치고, 하느님의 온전한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사진은 원주교구가 2009년 3월 시행한 제1기 ‘성요셉아버지학교’ 중 감사미사 후 진행된 발 씻김 예식 장면. 아버지들이 무릎을 꿇고 아내와 자녀를 위해 발을 씻어주고 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3. 삼위일체 : 부성과 모성의 원형
부성과 모성에 대하여, “교회는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에 관한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고 또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그릇된 관념과 경향으로부터 그 진리를 수호합니다”라고 선언한다(‘가정교서’ 12항). 그것은 바로 이것이 참 사랑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교회는 인간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끌어, 그들이 부모로서 받은 사랑의 소명을 발견하게 한다. 이 만남으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서 혼인성사의 은총으로 부부공동체의 성숙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현대사회 안에 만연한 ‘세속화’는 여러 형태로 가정이 파괴된 모습을 가져 왔다. 이런 이유로 부부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을 스스로 실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 엎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의 원형’이신 삼위일체 하느님만이 부부에게 그 소명을 성취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부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혼인성사의 은총에로 나아가야 한다. 성사의 은총은 부부로 하여금 한 마음과 한 몸으로 이끄는 인격적 심오한 일치를 동경하게 하고 참된 출산력에 열리도록 한다. 그리하여 부부는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미 몸 안에 새겨져 존재하는 ‘인격적 차원의 성’을 살 수 있다.
이로써 부부의 삶은 성성의 여정이 되며, 서로간에 성화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을 올바로 실현하는 것은 부부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의 신비 안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부부는 오로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의 눈’을 엶으로써 그들의 소명을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부부에게 맡겨진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의 원형이 바로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사랑’의 원형인 것처럼, ‘부부의 사랑’도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의 실현을 통하여 더욱 더 확장되고 깊어지게 된다.
참으로 부부는 자신들의 가정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의도를 채우는” 것이라고 하겠다(‘가정공동체’ 25항).
정연정 신부는 1993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수품됐다.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총무, 우면동본당 주임, 로마 한인신학원 재정담당으로 봉직했으며, 로마 교황청립 라테란대학교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주임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