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이 따로 없다.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며 한국교회의 뉴스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1면에 들어갈 사진 한 컷을 찍기 위해 밤을 지새워가며 기다리고, 취재원의 코멘트 하나 받기 위해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설득 작업을 반복한다. 교회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일에 항상 발 빠르게 움직이고, 눈으로 담고, 손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신문 기자들의 삶이다.
가톨릭신문 창간 87주년을 맞아 평소 얼굴도 보기 어려운 기획취재부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창간 기념호 제작에 여념이 없는 중에도 취재 현장에서 체험한 한국교회의 숨은 이야기를 ‘밝히기’ 위해서다. 미처 기사로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 참석자
박영호 편집국장, 서상덕 기자, 주정아 기자, 이지연 기자, 박지순 기자, 이우현 기자, 이승훈 기자
# 마감은 지켜져야 한다!!
▲이승훈 = 기자에게 ‘마감’은 빼놓을 수 없는 단어에요. 마감하면 생각나는 취재가 지난해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요. 대회 폐막미사가 봉헌된 코파카바나 해변에 전 세계 청년 300만 명 이상이 모였어요. 저는 그 한 가운데서 보도사진을 찍고 있었죠. 소매치기에 대한 소식을 익히 들어 모든 가방과 주머니 단속을 단단히 했어요. 근데 찰라의 순간 기분이 이상한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 지퍼가 열려 있고 그 안에 있던 핸드폰이고 뭐고 다 없어진 거예요. 당시 딸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안됐을 때인데 집에 연락할 길이 없으니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감’을 해야만 했어요. 행사가 밤늦게 끝나는 바람에 핸드폰을 잃어버린 아쉬움, 집에 연락 못하는 미안함은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어요. 최종마감날이 월요일인데 숙소에 돌아오니 한국은 이미 월요일 정오를 향해 가고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인터넷 상태도 좋지 않은 곳에서 특집 2판과 1면 메인기사까지 마감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납니다.
▲박영호 = 20년 전에 해외취재를 가면 인터넷이 없는데다 필름카메라를 사용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사진을 업로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필름을 항공우편으로 한국에 먼저 보내는 거였어요.
1997년 폴란드 취재를 갔을 때였어요. 20여 통의 필름을 우편으로 발송하려면 바르샤바까지 가야하는데 제가 현장을 비울 수 없으니까 가이드에게 약간의 사례비를 주고 부탁을 했어요. 한 시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필름이 중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예요. 가이드와 함께 말이죠. 그것 때문에 30분 동안 국제전화로 훈계를 듣고도 모자라서 귀국 후 출근 첫날까지 혼났어요. 어찌나 억울하던지…….
▲주정아 = 국외뿐만이 아니에요. 어쩌다보니 한반도를 둘러싼 삼면의 바다를 다 취재 갔었는데 그때마다 최악의 상황이라 배멀미의 진수를 제대로 체험했죠. 그 중에서도 몇 해 전 여름 특집 ‘그 섬에 가고 싶다’ 기획취재차 방문한 백령도가 잊혀지지 않아요.
취재는 백령도본당과 섬 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잘 마쳤어요. 그런데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지요. 갑작스러운 바다 안개로 인해 배가 뜨지 않는다는 소식. 그래도 첫날은 모처럼 휴가를 얻은 듯 쉬었죠. 그런데 다음날도 항구에 나가 3시간을 넘게 기다렸지만 결론은 결항. 비바람이 몰아쳐도 뜨는 배가 안개에는 꼼짝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때 취재부장님께 걸려온 하이톤의 목소리는 “인터넷 되는 컴퓨터 수배해~~~”였습니다. 시장에서 5000원짜리 이른바 몸빼바지를 사입고, 뜨겁게 달궈진 피정의 집에서 헉헉대며 기사 마감을 하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네요. 이메일로 사진 한 장을 올리는데 수십분의 업로드 시간이 걸리는 시절이었답니다.
# 기자들은 주교들의 보디가드(?)
▲이지연 = 기자들은 주교님들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많이 생겨요. 가장 최근에 있던 일이에요. 3월 4일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서임 감사미사’에 가서 엄청난 인파와 취재 열기에 깜짝 놀랐죠. 많은 신자들이 염 추기경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현장을 담아낸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날 신고 간 신발이 새신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기저기 밟혀서 너덜너덜해졌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저뿐만 아니라 기자단이 인간 바리케이드가 되어 있더라고요. 미사 후 염 추기경님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뵈려고 신자 분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는데, 제 몸이 밀리고 당겨지고 인파에 휩쓸리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서 하체에 무게 중심을 두고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고 서있었더니 자연스럽게 봉사자분들과 함께 인간 바리케이드가 된 거예요.
▲이승훈 = 가끔은 본의 아니게 다른 신자 분들의 눈총을 받을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수원교구 이성효 주교님께서 2012년 안산대리구 상록수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집전하셨을 때 일이에요. 미사가 끝나고 주교님과 인사하기 위해 신자 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저를 발견하시고 이 주교님께서 굉장히 반갑게 인사를 하시면서 반겨주셨어요.
그 때 주변에서 “저 젊은 친구는 누구지?” “도대체 누구기에 주교님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거지?”라는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시더라고요. 끝내 제가 가톨릭신문 기자라는 걸 현장에서는 밝히지 못한 채 ‘의문의 남자’로 남게 됐죠.
▲박지순 = 길거리를 걷다가도 우연히 주교님들을 뵙기도 해요. 명동에서 취재를 하고 사무실로 복귀하려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분이 다가오시는 거예요.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 분이 갑자기 저에게 악수를 청하시더라고요. 바로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님이셨어요. 설마 주교님께서 지하철역에 오시겠나 싶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더욱 놀랐어요. 그 자리에서 평소 우리 신문에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의견을 전해주셨어요. 제가 가톨릭신문 기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서상덕 =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님은 천주교에서는 물론 타종교 기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으세요.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신 대주교님과 몇 차례 해외순례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어요. 타종단 기자들과 함께요. 대주교님께서 앞에 나서서 모든 설명을 다 해주시고 일정이 끝난 후에는 기자들에게 먼저 다가와서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셨죠. 그랬더니 타종단 기자들이 나중에는 “우리 주교님, 우리 주교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도 감화를 줄 정도로 소탈한 인품을 갖고 계신 분이 한국천주교를 대표하는 분 중 한 분이라는 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 함께 만드는 따뜻한 뉴스 제작소
▲이우현 = 입사한지 6년 차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는 감동적인 사연들인 것 같아요. 2009년 급성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난 고(故) 남윤호(사무엘) 군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수원교구 모전동본당 신자들이 만두를 빚어서 판매한 이야기를 취재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윤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어요. 아홉 살 천사 같은 아이였는데 하느님께서 너무 빨리 데려가셨다 싶었어요. 지금도 윤호를 생각하며 기도해요. 그리고 윤호 어머니와 계속 연락하면서 위로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어요.
▲주정아 = 우리 신문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코너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는 정말 오랫동안 많은 분들께서 도움을 주시고 있어요. 독자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요.
수습기자를 떼고 정식 기자가 돼서 처음으로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 관련 취재를 하게 됐어요. 어린 마음에 성금이 많이 모이지 않을까봐 걱정하면서 기사를 썼어요. 그리고 몇 주 후 성금 현황을 확인하려고 은행을 갔죠. 통장정리를 해보니 1만 원, 5000원, 3000원 이렇게 찍혀 있는 거예요. 정말 코끝이 찡했어요. 당시에는 인터넷뱅킹도 없어서 일부러 은행에 가서 이체하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여러가지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고 이웃을 돕기 위해 사랑을 나눠주신 분들의 흔적을 느낄 때마다 감사하고 기뻤어요.
▲박지순 = 저도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를 통해 만난 고(故) 정다운(스테파노) 군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약 4000만 원이 모금이 됐어요. 공부 잘하는 어린 학생의 아픔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 것 같아요. 취재 후에 개인적으로 병문안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뤘어요. 그러다 안되겠다 싶어서 하루 날 잡아서 찾아갔는데 다운 학생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어요.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돌아왔는데 바로 그 다음날 다운 학생이 선종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장례미사 끝나고 나중에 다운 학생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보여준 관심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주셨죠.
▲서상덕 = 저는 글의 힘을 절대적으로 체험했어요. 1997년 가을과 겨울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행당동 재개발 지역 철거’ 사건이었어요. 성탄을 앞두고 한 평 남짓 비닐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는 행당동 철거촌을 찾아갔죠.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겨우겨우 살아가는 데 그것마저도 철거반원이 들이닥치면 온전하게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어요. 이러한 안타까운 내용을 기사화했죠.
그 기사를 보고 김수환 추기경 비서 신부님께서 연락을 해왔어요. 김 추기경님께서 연말에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신다고요. 덕분에 행당동 철거민들이 마음만큼은 따뜻한 연말을 보낼 수 있었죠. 그 이후 10년 간 철거민들의 숙원이었던 재개발이 이뤄졌고, 가이주단지가 생겨서 철거촌 37가구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 거죠. 그 분들이 현재 금호1가 선교본당을 꾸리는 구성원이 됐습니다.
# 가톨릭신문 기자로 산다는 것
▲이승훈 = 입사 후에 기자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과연 내가 기자를 해도 될까? 이 일에 적합한가?’ 등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죠. 분명 성소가 있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일텐데 광야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기자로서 시간이 쌓일수록 제가 느끼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 무슨 일에서든 함께 계시는구나!’라는 확신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어요. 가톨릭신문 기자는 세상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이라고요. 현장에서 만난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이라고요.
▲서상덕 = 가톨릭 언론인들 특히 신문사 기자들은 ‘첨병(尖兵)’이라는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하느님의 다양한 부르심을 듣고, 깨닫고, 응답할 수 있도록 투철한 신앙과 소명의식으로 무장해야 해요. 물론 싫은 소리도 듣고 위험하고 힘든 상황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늘 신문 기자로, 특히 가톨릭언론기관 기자로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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