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인간’(1981)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기념하여 반포한 회칙으로, ‘인권의 사도’로서의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심을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사회교리 문헌이다.
이 회칙은 인간 노동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의 모든 전통적 내용들을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세상의 발전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노동하는 인간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곧 이 회칙은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과 그와 관련된 사회 문제들을 직시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다.
‘노동하는 인간’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형태로 반포되기는 하였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로마의 주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과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과 함께 대화하는 긴 편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경제학이나 사회학 혹은 신학에 대해 학술적이고도 전문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성서학이나 영성신학에 관해 직접적으로 쓰고 있는 문헌도 아니다. ‘노동하는 인간’은 단순히 현대 세계, 특별히 현대의 노동 세계 안에서 드러나는 여러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또 해답을 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대화 형태에서 발전된 사목적 차원의 담화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현대 세계의 노동 현장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권고하고 제안할 뿐이지 어떠한 오류도 없는 확고한 지침으로서의 어떤 제도나 체제를 주장하지 않는다.
회칙에 나타나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상적 배경은 특별히 가톨릭교회의 대 사회 가르침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마르크스주의와의 비판적이고도 창조적인 대화에서 분출되는 새로운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교황은 마르크스의 일부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그 영향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고 그 사상들을 발전시키고 경직성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확장시킴으로써 이미 내부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초월하는 사회철학을 형성한다. 교황은 동유럽 폴란드 출신 교황으로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상황은 물론 서유럽 국가들의 상황, 나아가 친히 사도적 방문의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개발도상 국가들의 상황이나 환경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청년시절에 육체노동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노동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과 함께 교황은 이 회칙에서 인간 노동의 품위를 견고히 하고, 인간 사회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의 중심에 인간 노동을 위치시키고 강조한다. 특히 노동의 기본 원리를 구체화 시키지 않는 모든 제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모든 일에 있어서 노동의 우선권을 강조하며,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조합에 지지를 보내며, 마지막 장에서는 노동의 영성에 대한 윤곽을 제시한다.
▲ 회칙 ‘노동하는 인간’은 인간 존엄성을 드러내는 노동의 윤리적 의미를 밝히고, 물질주의에 침해되지 않도록 노동에 관련한 인권을 역설한다.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모습.
‘노동하는 인간’의 의의
우선 인간 노동의 의미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이전까지 가르쳐온 내용이 주로 노동의 보상으로서의 정당한 임금과 관련되어 있다 한다면, ‘노동하는 인간’은 성서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간 노동을 조명한다.
곧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고양시키는 존재이며, 또한 노동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이루어가며 더욱 더 인간답게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노동의 윤리적 의미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실 ‘노동하는 인간’에서의 인간 노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단지 인간 권리와 인간 속성이라는 자연법의 추상적인 재고로부터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 개인의 구체적인 결함에서부터 시작된다 : “노동이 인간에게, 인간의 인간성에 좋다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면서, 자연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완성을 이루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더 인간답게 되기 때문이다”(9항).
이렇게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 노동의 사회적 가치는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관점에서부터 드러나고 있고, 따라서 그에게는 인간 노동의 경험적 측면이 더욱 큰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사목자, 신학자로서 분배 - 소득, 부, 사회적 지위, 정치적 권력, 기회 그리고 인간성에의 창조적 참여 - 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노동하는 인간’의 독창성이 잘 드러나는 내용이기도 하다. 회칙 ‘노동하는 인간’이 언급하고 있는 분배 기준은 단순히 사랑과 유사한 정의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無産者)와 서로 나누어야 할 책임을 도덕적으로 함께 나누는 데에 있다.
‘노동하는 인간’이 가지는 의의 중 또 한 가지는 물질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는 선임 교황들의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으로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 둘 모두에게 위험 요소로 존재하는 물질주의를 같은 맥락에서 분석, 비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이론적 물질주의(유물론)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볼 수 있는 실질적 물질주의 양쪽 모두에 요한 바오로 2세의 화살이 돌아간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론적 물질주의는 “정신적 실재를 피상적 현상으로 격하”(13항)시키며, 실질적 물질주의는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에 예속시킨다”(13항)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체제에서 물질주의의 양상은 “사물들 보다 우선하는 인간의 우위성”(13항)을 쉽게 거스른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비판은 인간 노동을 ‘상품’으로 보려고 하는 보편화된 현상에 대한 고발이며, 인간 노동을 ‘사물’(상품)로 간주하는 현상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인간 노동에 대한 인간성 강조는 이제 노동에 대한 사고와 평가에 있어서 보다 인간적인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렇지만 요한 바오로 2세의 염려는 여전히 노동이 상품으로 취급되고 나아가 집단적인 경제적 투자로서의 노동력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업의 최대 이윤 추구와, 노동시장에서의 갈등과 착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11항).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있어서의 기업가의 행위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비판은 결코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자유시장 체제의 합리성, 능률 그리고 성장 잠재력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참된 개념을 왜곡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물질주의를 비난하는 것과 관계되는 경제, 정치, 사회의 다양한 조건에서의 부당한 분배에 대한 비난으로 보아야 한다.
회칙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와 내용이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노동하는 인간’은 복음정신에 충실히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책임감을 부여함으로써 인간 노동에 관한 이전의 그 어떤 문헌보다도 훨씬 발전된 문헌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동익 신부는 1983년 서울대교구 사제로 수품 됐으며, 로마 라테란대학교 성알폰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 공항동본당 주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교황청 생명학술원 회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총무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