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의 인간 실존
고통은 인간의 현세적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즉,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연속적인 고통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안에서 고통은 여러 한계 체험을 통해 매우 다양한 양상과 차원으로 나타난다.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중대한 고비에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게 되고, 때로는 깊이 낙담하여 좌절하기도 한다. 어찌해볼 수 없는 시련의 상황 속에 슬픔과 아픔을 느끼고 깊은 상실감에 젖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속세의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부른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풍랑이 이는 광대한 바다에서 한 작은 배에 몸을 싣고서 물결치는 대로 아슬아슬하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살이인지도 모른다. 폭풍우가 다가오면 강한 바람과 높이 솟은 파도에 두려워하고, 살아남기 위해 온통 물에 젖은 상태로 안간힘을 다해 노를 저어가는 그런 고통스러운 여정이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라는 비유에 공감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이 모인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성사로서의 교회는 고통 속의 사람들을 만나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현세 생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인간이 어떤 모양으로든 머나먼 고통의 길을 걷고 있기에, 바로 이 길에서 교회는 언제나 인간을 만나야 한다”(3항)는 것이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생각인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자비와 돌봄의 마음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당연한 실존이자 사명이다.
▲ 지난 3월 6일 시리아의 알레포 지역에서 일어난 폭격 사태로 피해 입은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절규하고 있는 모습.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을 통해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이 분쟁·전쟁과 같은 집단적 차원에서 많이 드러난다며, 연대적으로 묵상하고 교회 공동체적으로 대처할 것을 강조했다. 【CNS】
인간 고통의 성서적 의미
어떤 의미에서, 성경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6항)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인간 고통이 묘사된다. 자신이 마주하게 되는 병고와 죽음의 위협,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사별의 아픔, 특히 외아들과 맏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의 비통한 심정, 주변 사람들에 의한 박해와 위협,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조롱과 경멸, 처절한 외로움과 소외감, 왜 악인이 번성하고 착한 사람이 고통당해야 하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 등이 신구약 성경의 곳곳에서 표현된다.
특히 구약성경의 시편과 욥기에는 이러한 고통에 대한 직접적 묘사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시편 137장에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강 기슭 거기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고통이 생생히 묘사된다. 욥기에서는 “선을 기다렸는데 악이 닥쳐오고 빛을 바랐는데 어둠이 닥쳐오기에, 속은 쉴 새 없이 끓어오르고 고통의 나날은 다가오네”(30,26-27)라는 절규가 나온다. 사실, 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처럼 의인들의 고통을 허락하시고 악인들이 위세 부리며 살아가게끔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지 우리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시편과 욥기의 저자가 그토록 처절하게 질문했던 내용의 핵심이다.
우리는 인간 고통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를 지금 온전히 알 수는 없다. 때로는 나의 잘못과 죄 때문에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고통의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그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너무도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수만 있다면, 이미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아직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하나의 신비인지도 모른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미몽과 어둠 속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기”(1코린 13,12) 때문에 그 고통의 의미를 아주 부분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오직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때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할 뿐이다. 언젠가는 하느님 친히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눈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며 흘려야 했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때가 오리라고, 그래서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때가 오게 되리라 믿고 희망할 뿐이다(묵시 21,3-4 참조).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지금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아픔에 관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고통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즐겨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너무도 지극히 사랑하시어 오히려 인간과 함께 깊이 마음 아파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의 신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 받는 우리와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수난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의하면, 그 어떤 대답도 인간 고통을 자아내는 악의 기원과 존재 문제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도 있었지만,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셨다(309-310항 참조). 그리고 그 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 스스로 아픔을 겪으시는 것이다.
인간 고통의 연대적 차원
우리는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이 분쟁과 전쟁의 상황과도 같이 집단적 차원에서 많이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이 곧 인간의 보편적 죄악성과 연결되어 있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제기”(7항)하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인간 죄악의 역사적 보편성’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즉, 특정한 인간의 죄과는 다른 인간이 지닌 자유로운 상황에 연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류는 곧 하나이고, 인간은 매우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많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여 죄짓게 만들고 고통을 겪게 하는 집단적인 ‘구조악’의 개념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고통의 연대적 차원에 대하여 말한다. 죄악의 보편성에서 비롯된 인간 고통을 연대적으로 묵상하고 교회 공동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고통의 세계는 많은, 매우 많은 주체들 속으로 나누어져 들어가서 이를테면 ‘산재’하고 있습니다. 각 개인이 각자의 고통을 통하여 이 ‘세계’의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가 그 사람 안에 하나의 무한하고도 둘도 없이 유일한 실체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인간 상호 간의 사회적 차원도 있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이를테면 그 ‘고유한 연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산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 안에 ‘소통과 연대’라는 단일한 요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8항)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온 인류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보편적 죄악성에 대해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한 형제자매의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이처럼 고통과 악의 실재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보편적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트려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누구든지 저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처럼 느낀다. 죄는 인간을 위축시켜 완성을 추구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13항)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는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