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품을 받고 얼마 후, 교구장 주교님께서 새 신부들을 모아 놓고 물으셨다. “신부님들께서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사목활동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리고는 자신이 관심 있는 세 분야를 적어내라고 하셨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세 줄을 모두 ‘본당 사목’으로 채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저 친구가 좋아 성당에 첫 발을 내딛었고 또 친구 따라 예비 신학생 모임에 갔다가 오늘에 이른 것처럼, 늘 신자들과 가까운 곳에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3년간의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첫 본당에 발령받았을 때의 그 설렘이란…. 사제로서 신자들을 만나 사목생활을 한다는 것에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오랜 시간 본당을 떠나 살게 됐다.
남한산성순교성지 담당 겸임을 맡고서는 후원회 모집과 성지조성공사에 밤낮없이 매달렸고, 이후 성지 전담신부로 살던 중 민족화해위원장으로서 북한 복음화와 탈북자 지원에 매진했다. 성지가 점차 안정돼 감에 따라 나는 주교님께 언어연수 후 본당으로 돌아가고 싶다 청했으나, 다시 중국 선교활동 명을 받았고, 척박한 중국 땅에서 신앙을 지키고 사는 교우들과의 만남이라는 기쁨과 동시에 선교의 자유가 억압된 곳에서 5년 동안 매일 미사를 벽을 바라보고 봉헌하는 아쉬움도 느껴야만 했다.
중국에서의 답답한 생활에 지쳐갈 무렵 신갈본당 본당 신부로 발령받게 된 나는 첫 본당 부임 때처럼 가슴이 뛰었고 교우들과 드리는 미사와 만남을 통해 하루하루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교님께서는 사회복지나 병원사목에 전혀 문외한인 나를 다시 지금 이 곳 성루카 노인전문 요양센터로 보내셨고, 요양시설 증축을 위해 난생처음 설계도면과 회계장부를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사제로서 내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세 줄 모두 본당 사목으로 채웠던 나는 더 많은 시간동안 다른 방향의 삶을 살게 됐으며, 많은 신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꿈을 이루고자하지만 때론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우리 삶이기에,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 멋진 인생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 본당 신부로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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