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회사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한 워렌 슈미트(잭 니콜슨)는 오늘 은퇴를 한다. 직장 동료들의 따뜻한 송별파티에서 후임자의 찬사와 평생 친구인 레이의 축사가 있었고 딸 지니(홉 데이비스)가 축하의 전화도 걸어왔다. 이 때 아내 헬렌까지 나서 든든한 내조자로 워렌의 곁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니 누구라도 바랄만한 멋진 은퇴 장면이었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 멋지기만 하던가?
관객들은 이쯤에서 슬며시 워렌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꼬일지 지켜보는 기대감이 생기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불행의 바닥으로 직진하고 만다. 안일하게 은퇴한 자가 치러야만 하는 잔인한 대가였다. 사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만든 영화치고 여태까지 지루하다거나 무의미한 영화는 없었다. 그는 작품 하나를 만들어도 가슴에 와 닿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능숙하게 풀어나가는 데 있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감독이다. <어바웃 슈미트>(코미디, 미국, 2002년, 125분) 역시 그의 기량이 유감없이 표현된 작품임에 틀림없다.
페인 감독의 연출 성향을 보면 종종 로드무비라는 코드를 섞어 넣어 영화의 완급을 조절한다. 워렌 역시 거대한 캠핑카를 끌고 고향에도 가고, 졸업한 대학도 방문하고, 서부개척 역사가 담긴 마을도 들른다. 만일 이런 식의 여유를 부리지 않는다면 <어바웃 슈미트>는 그저 메시지에 충실한 계몽적인 영화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워렌이 길에서 찾아낸 것은 멋진 풍광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기에 하는 말이다.
긴 여행을 감행한 후 워렌은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의 마지막 독백은 여행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외로움과 후회와 실패에서 오는 절망뿐이었다. 가냘픈 희망을 좇아 길에 나서보았지만 귀향(歸鄕) 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는데,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人)들의 위대한 서사시 「길가메시」의 주제가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그처럼 인생이란 허무에 불과하다. 이 메시지가 너무나 가슴을 울리기에 사실 그 장면에서 영화가 끝났다 한들 작품의 질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워렌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한 눈물을 못 보지 않았는가!
엔두구! 부르기도 낯선 여섯 살 난 탄자니아의 꼬마. 그는 부모가 전쟁 통에 죽은 고아 소년이며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더 이상의 불행은 없음직한 웨렌에게 엔두구의 편지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엔두구의 그림 편지다.
러시아에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시면 다른 쪽 창문을 열어주신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면으로는 차마 알려줄 수 없지만, 이 지혜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분이 있으면 꼭 <어바웃 슈미트>를 보시길 바란다. 절대 실망치 않을 것이다.
박태식 신부는 서강대 영문과와 종교학과 대학원을 졸업 후 독일 괴팅엔대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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