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요한 23세는 교회의 현대화와 쇄신의 이정표를 세우고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모든 민족의 평화와 대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다. 요한 23세 덕분에 현대교회는 ‘세상의 문제가 바로 교회의 문제’임을 적극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가 단단한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요한 23세의 비서직을 오랜 기간 역임한 로리스 F. 카포빌라 몬시뇰이 “교황님은 겸손함에 있어 위대하셨고, 위대함에 있어 겸손하셨다”고 회고한데 대해서도 수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미국 가톨릭교회 학자들은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실시한 조사에서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함께 요한 23세 교황을 선택하기도 했다. 군주적인 교황상을 버리고, 교황직을 ‘로마의 주교’라는 평범한 사목직으로 변화시키는 등 전 세계인들의 진정한 목자로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넓게 펼쳐진 팔을 교황직의 이상으로 삼았던 요한 23세. 누구에게나 온화하게 손을 내밀었던 ‘착한 교황’ 요한 23세는 1958년 10월 28일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인들과 마주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의 첫 강복이 TV 중계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해진 순간이었다.
▲ 교황 요한 23세가 1963년 회칙 ‘지상의 평화’에 사인하고 있다.【CNS】
비오 12세 교황이 선종하자, 새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에 참가한 추기경들은 보수와 개혁 성향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대립했다. 12번의 투표를 한 끝에 선출된 제261대 교황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교회와 언론들은 78세 나이에 선출된 이 교황을 향해 ‘과도기적 교황’이라는 냉소적 시선부터 쏟아냈다.
교황으로서의 삶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냉전이 극대화될 시점에 시작됐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신생 독립국들이 줄이어 탄생하고,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산업화는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공산주의 아래 종교의 자유를 빼 앗긴 가톨릭신자들은 늘어갔고, 전통적인 가정의 형태는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교회의 목소리는 이미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잃고 있었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할 뿐 아니라, 변화된 현실을 넘어서 복음을 전해야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요한 23세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행보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재위 기간 중에 풀어야할 신학적, 역사적 문제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요한 23세는 우선 그 시대 모든 인간 문제를 핵심으로 제시하고 숙고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먼저 교회를 쇄신함으로써 세상을 쇄신하자’고 독려했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불렀으며, 가톨릭교회 내의 일치와 교회와 인류와의 일치 등 모든 분야에서의 일치를 추구했다.
쇄신과 평화, 일치를 향한 변혁의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딘 것이다.
■ 세상을 향해 문을 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2년 ‘신앙의 해’를 선포하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관해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 우리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고 현재를 살아가는데 확실한 ‘나침반’”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연설에서 ‘이 공의회는 형제애를 통해 현대인들을 하느님께 다시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정의했다.
이에 앞서 요한 23세 교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여는 취지는 “불변의 교리와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에 맞춰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 가면서, 시대가 주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완전히 하도록 하는 길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시작은 ‘침묵’이었다. 요한 23세가 즉위 후 석 달 여 만에 세계교회를 위한 공의회를 열자고 제안하자, 추기경들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머릿속엔 공의회는 이단을 단죄하기 위해 여는 것이라는 편견이 자리한 것도 한 몫을 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신학의 다원주의로 인한 신앙의 혼란, 교회의 민주화로 인한 교황과 주교의 권위가 약화되고 종교 무분별주의가 생겨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모두의 우려와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른바 전통적인 ‘교의적 공의회’가 아니라 사목에 대한 원칙을 제시한 자리로 펼쳐졌다. 이 공의회를 통해 논의, 결정된 내용들은 모두 각 지역교회 실생활을 통해 구현돼야할 시대적 소명들이었으며, 교회가 영적인 동시에 세상 안에 있는 조직임을 적극 인식하고 현대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밝혀주고 있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요한 23세는 현대 세계에로의 적응과 대화,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연대성 강화,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는 정신까지 드러냈다.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와 타종교와의 화해 및 협력, 평신도 사도직이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길도 닦아낸 장이었다.
▲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식. 【CNS】
■ 모두가 형제입니다
요한 23세의 재임 시기는 1,680일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가 발표한 교황 문헌 전반에는 진리와 화해와 평화를 촉구하는 뜻이 실려 있다. 특히 요한 23세는 각 문헌들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목적과 의미 등을 단계별로 드러내고 지지해왔다.
첫 회칙은 선출 이듬해인 1959년 발표했다. 회칙 ‘베드로 좌를 향하여’를 통해 요한 23세는 공산주의 철의 장막 뒤에서 박해받는 ‘침묵의 교회’를 격려하고 손을 내밀었으며, ‘가톨릭 신앙의 발전’, ‘그리스도인의 생활 쇄신’, ‘교회 규율의 현대 적응화’ 등의 공의회 목적을 밝혔다.
이 회칙을 낸 지 불과 두 달 만에 회칙 ‘우리 사제직의 기원’을 내고 사제다운 성덕을 강조했으며, 같은 해 교회 선교에 관한 회칙인 ‘으뜸목자’까지 반포했다.
이 세상의 영적 결핍이 심화되고, 하느님과 교회를 거부하는 모습에 요한 23세는 철저한 쇄신을 촉구했다. 1961년 반포한 사도 헌장 ‘인간의 구원’에서는 이러한 쇄신을 촉구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관해 소개했다. 이에 앞서 회칙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를 통해서는 냉전의 장벽에 갇혀버린 지역교회의 위기상황을 경고했다.
‘어머니요 스승’(1961)과 ‘지상의 평화’(1963)는 세계 평화와 정의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 사회적 가르침이다.
회칙 ‘어머니요 스승’에서 요한 23세는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불의와 불평등을 고발하고 참된 가치 체계를 회복, 인간다운 삶을 독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회칙 ‘지상의 평화’는 암투병 중에도 멈추지 않고 집필, 요한 23세가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이자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이 회칙에서 평화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 진리와 정의, 사랑,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 회복되고 더욱 견고해진다고 밝혔다. 20세기 들어 전 세계가 두 차례의 엄청난 전쟁과 대학살극을 겪고 냉전의 장벽으로 반복하던 시기, 평화의 비전을 천명한 목소리였다.
수많은 이들, 교황청 측근들조차 반대에 반대를 거듭했던 요한 23세의 행보는 지금의 교회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됐고, 미래 교회의 희망이 되고 있다.
1963년 6월 3일, 그는“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마지막으로 지상에 남은 이들과 인사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는 살면서 줄곧 드러낸 선함과 온화함, 진리와 평화,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를 위해 보인 열정, 하느님의 사자와 인류의 종이 되려는 뜻이 뿌리내려졌다.
▲ 바티칸라디오를 찾은 요한 23세. 【CNS】
▲ 2000년 시복된 요한 23세.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